좋은 말씀/신국원교수

[기독교문화 변혁, 핵심 읽기] (12) ‘빨리 빨리’ 문화

새벽지기1 2016. 9. 2. 07:44


지금은 속도가 아닌 성숙이 필요하다

한국교회, 진리에 바로 서서 ‘성숙의 문화’ 이끌어야


  
 ▲ 신국원 교수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가장 먼저 배우는 한국말은 “빨리 빨리”라고 합니다. 외국 관광지에서도 상인들이 한국 손님을 끌려고 “빨리 빨리”를 외쳐 댑니다. 언제부턴가 “빨리 빨리”가 우리 문화의 특징이 되고 말았습니다. 선진국을 급히 따라 잡으려다 보니 그리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젠 우리도 속도보다는 성숙도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합니다.



변해버린 국민성

한 세기 전까지 우리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고 불렸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바쁘고 요란한 곳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서구가 400년에 걸쳐 이룬 근대화를 40년 만에 해치웠습니다. 밤잠 안자고 빨리 해치우는 극성스러움이 오늘의 번영을 이룬 동력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과연 고속 성장과정에서 무엇을 얻고 어떤 것을 잃었는지 돌아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근대화 과정이 국민정서를 크게 바꾸어 놓은 것은 사실입니다. 옛 고교 교과서에 한국 문화의 특성을 “은근과 끈기”라고 한 글이 있었습니다. 반만년 역사 내내 무수한 외국의 침략과 역경을 극복한 저력을 그리 평한 것입니다. 화려하지는 않아도 몇 달을 피는 나라꽃 무궁화처럼 참을성 많은 민족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런 우리가 어느새 냄비근성으로 바뀐 것입니다. 물론 인내 상실은 우리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미국인들도 17분 이상 줄서기나 9분 넘는 전화대기는 참지 못한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은 몇 초만 지연되어도 짜증내고 교통체증엔 분통을 터트린답니다. 세계 어디서고 여유 있는 삶은 찾아보기 힘든 것 같습니다.


고속성장과 성과중심주의

그렇다 해도 우리에겐 여전히 빠름과 급성장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너무 강합니다. 무한경쟁시대에 빠른 것은 분명히 장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일이 빨리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도 안 됩니다. 서둘러서 안 될 일을 빨리 하려다 보면 반드시 문제가 터지게 마련입니다.

최근 숭례문 졸속 복원 사태에서 보듯 뭐든 빨리 대충 해치우려다 보면 부실과 날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심한 경우 성수대교 붕괴 같은 일이 터져 “사고왕국”이란 오명을 쓰기도 합니다. 정당한 절차와 과정을 무시하고 성과에만 매달려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는 나쁜 풍조가 체질화되고 말았습니다. 조급한 마음에 멀리 못보고 코앞의 이익에 눈이 먼 한탕주의가 판치고 도덕불감증에다 준법정신 실종 등 보통 심각한 상황이 아닙니다.

세상엔 서둘러서는 결코 안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옛 격언처럼 아무리 바빠도 실을 바늘허리에 매서 쓸 수는 없는 법입니다. 특히 인격 성숙이나 신뢰 구축 같은 것이 그렇습니다. 경제나 정치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속성장은 한계가 있고 대박신화는 투기판에나 어울리는 일입니다.


선진 한국에서 성숙 한국으로

  
 ▲ 일러스트=강인춘 

정신없이 질주하던 우리 사회에도 반성이 시작되었습니다. 얼마 전 한 승려는 <멈춰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책으로 세간의 주목을 끌었습니다. <느리게 산다는 것(Downshifting)의 의미>라는 책을 쓴 피에르 쌍소는 삶을 진정으로 즐기려면 속도를 줄이라고 권합니다. “슬로우 시티(slow city)”나 “슬로우 푸드(slow food)” 운동은 이런 주장을 이미 실천하는 중입니다.



고속 성장에 전력 투구해온 한국 기독교도 스스로를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지난날의 교회 성장도 바쁘게 뛴 결과만은 아닙니다. 목회자들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 희생적으로 검소하게 살며 정직하게 인내한 것이 중요한 요인입니다. 목회는 농사와 같아 절대로 요행을 바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을 자주 농사에 비유하신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습니다.

영적 성숙은 믿음에 덕과 지식, 절제와 인내가 더해 맺어진 경건과 사랑의 열매(벧후 1:5~7)입니다. “구원은 순간에 일어나는 은총이지만 성화(聖化)는 평생 애써야 할 사명입니다.” 성화는 “속성”이 아니라 “성숙”으로만 이룰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이런 진리에 바로 서서 성숙의 문화를 이끌어야 할 중요한 시점이 되었습니다.

신국원 교수  ekd@kido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