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 빠진 독은 채울 수가 없는가? 사실상 이런 질문은 하나 마나한 것이다. 밑 빠진 독에 한 바가지 물을 부으면 한 바가지 물이 쏟아져나가고, 두 양동이 물을 부으면 두 양동이 물이 쏟아져버린다는 사실쯤은 세 살 먹은 아이도 알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 리가 없겠지만 만일에 누군가가 밑 빠진 항아리를 채우기 위해서 하루 종일 물지게를 지고 물통을 나른다면 그를 보고 하품을 금치 못할 것이다. 밑 빠진 독은 채울 수가 없다. 그것은 아무 짝에도 쓸모 없이 괜히 자리만 차지하는 거추장스런 폐물에 지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밑 빠진 독과 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과거 모습을 한 마디로 이렇게 정리한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폭행자였으나" (13). 사도 바울은 회심 전에 유익이 되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은 물론이고, 있으나 마나한 그런 사람도 아니었다. 오히려 회심 전의 사도 바울은 엄청나게 손해를 주는 사람이었다.
그가 열거한 세 단어 훼방자, 핍박자, 폭행자는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가 조금씩 다르기는 하겠지만 부인할 수 없는 공통점을 한 가지 지니고 있다.
그것은 어떤 대상에게 상당한 손해를 끼쳤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파괴하려고 했던 사람이다 (고전 15:8-9; 빌 3:6). 회심 전에 그는 하나님의 교회 편에서 보면 플러스가 아닌 것은 분명하고 제로를 넘어서 마이너스가 된 사람이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마이너스의 인간이 된 까닭은 무지 때문이었다. "알지 못하고" (13). 비록 그가 여기에서 무엇을 알지 못했는지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가 알지 못했던 것은 하나님이 구속을 위하여 원대한 계획을 세워놓으셨다는 것,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셨다는 것, 교회는 예수 그리스
도의 구속 실현으로 말미암아 건설된 공동체라는 것, 이런 등등이었음을 의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사도 바울의 무지는 불신에서 기인한 것이다.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13).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불신은 무지의 바탕이었다. 그의 무지는 단순히 지적 능력의 부족을 의미하지 않는다. 실제로 사도 바울 만큼 지적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이 세상에 또 얼마나 있겠는가. 이것은 역설적으로 말해서 지난 이천년 동안 각 시대마다 천재에 가까운 사람들이 그의 글을 하나님의 계시로 믿지 않으면서도 열심히 연구한 것만을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불신으로 말미암아 무지한 자가 되고 말았다. 불신이 무지를 잉태하고, 무지가 해악을 출산한다. 불신 때문에 무지하고, 무지 때문에 해악이 되었던 사도 바울은 밑 빠진 독과 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밑 빠진 독과 같은 사도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긍휼을 베푸셨다.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13). 이 긍휼은 전적으로 밖에서 온 것이다. 사도 바울은 단지 수동적인 입장에 서 있었을 뿐이다. 불신과 무지와 해악으로 말미암아 밑 빠진 독 같은 폐물이 되어버린 그가 무슨 능동적인 일을 할 수가 있었겠는가. 오직 깨뜨려 내버려지는 것만이 유일한 운명인 이런 쓰레기 같은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임했다. "우리 주의 은혜가"(14).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는(사 42:3) 은혜가 임한 것이다. 게다가 그 은혜는 신뢰와 사랑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14). 주님의 신뢰와 사랑과 은혜가 바울의 불신과 무지와 해악을 이겼다. 주님께서는 바울의 불신을 믿음으로, 바울의 무지를 은혜로, 바울의 증오를 사랑으로 이기셨다.
신뢰와 사랑으로 무장한 주님의 은혜는 밑 빠진 독 같은 사도 바울을 잠기게 하고도 모든 시간과 공간에 넘칠 정도로 큰 것이었다.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4). 우리 밖에서 오는 은혜의 규모는 세상의 모든 바다를 합한 것보다도 크다. 사도 바울은 이 은혜의 바다에서 넘치도록 풍성한 은혜로 채워졌다.
그렇다. 밑 빠진 독도 넘치도록 가득 채울 수가 있다. 바다 속에 던져진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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