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교리해설

[라은성 교수의 쉬운 교리해설] (21) 그리스도의 사역②-비하와 승귀

새벽지기1 2016. 7. 23. 11:23


선택된 백성의 놀라운 위로와 혜택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지난 주에 살폈던 ‘그리스도의 3중직’에 이어,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이다. 이것을 간략하게 ‘비하(卑下·Humiliation)’와 ‘승귀(昇貴·Exaltation)’라 표현한다.

이 주제 역시 ‘3중직’처럼 중보자 사역에서 보다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웨스트민스터 기준은 3중직 다음 순으로 비하와 승귀를 설명하고 있다.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이란 용어는 웨스트민스터 기준에만 사용되는 단어이다. 칼빈의 <기독교강요> 역시 2권 15장에서 3중직을 설명한 후, 16장에서 ‘사도신경’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에 관한 설명은 십자가에 못 박히심부터 재림하시는 고백에까지 이른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중보자라는 제목 아래 그분의 3중직과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이란 소제목을 포함시키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또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 35~52문까지 많은 분량을 할애하면서 이 주제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 여기에서는 낮아지심이나 높아지심이라는 용어는 사용되지 않지만, 그 내용에 대해서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 주제와 관련하여 <벨지카 신앙고백서> 18항에서 성육신과 함께 설명하고 있는데 주로 낮아지심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먼저, 그리스도의 낮아지심(비하)은 성육신하기 전부터 시작된다. 자신의 영광을 비우심, 성육신으로 말미암는 잉태, 출생, 고난, 죽으심, 장사됨 및 죽음의 권세 하에 거하심을 포함한다(<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서> 27문).

①그리스도의 잉태는 반드시 ‘동정녀’ 탄생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 이유는 그분의 무죄성을 고백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 35문).

②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반드시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그 이유는 그분이 우리가 받아야 하는 ‘하나님의 진노’를 담당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 37문).

③그리스도의 죽으심에서 꼭 기억해야 하는 것은 “우리 죄들을 위한 만족”을 위해서 필연적인 것이라는 것이다(<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 40문). 또 우리도 죄성과 내적 투쟁을 평생 해야 하고, 그 아픔이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심과 유사함을 보이기 위함이다.

④장사되셔야 하는 이유는 본디오 빌라도의 이름이 ‘사도신경’에서 고백되는 것과 같은 이유이다. 바로 역사성 때문이다. 그분이 실제로 죽으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류의 죄 값을 치러야 하는 필연적인 진리이다.

⑤그리스도께서 지옥에 내려갔다는 사실에 대해 한글 ‘사도신경’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성경에는 기록되어있다(벧전 3:19, 4:6). 이 의미는 상징적인 것으로 “지옥의 고뇌와 비통서 구원하셨음을 나에게 확신시키기 위함”이라는 것이다(<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 44문).


또 칼빈은 2권 16장 8~11항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베드로가 이 문구를 사용한 이유는 전에 죽었던 신자들도 우리와 동일한 은혜에 참여한다”는 것이고, “우리의 속죄의 대가로 그리스도의 몸이 정죄를 받고 버림을 받으며 자신의 영으로 무시무시한 고통을 받으심으로 큰 대가를 지불하셨음을 의미한다”고 한다(2권 16장 9, 10항). 우리에게 더 이상 죽음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2권 16장 11항).


둘째,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의 시작은 부활이고, 이어서 승천, 오른 편에 좌정하심과 재림 및 심판이다.

①인류에게 최대의 공포는 죽음인데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 죽음을 더 이상 하나님의 자녀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고, 새생명의 약속과 부활에 대한 확증을 의미한다.

②그리스도의 승천은 자신에게로 우리를 데리고 가심을, 성령을 보내심을, 변호하심을 의미한다(<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 49문). 육체로 올라가심 그대로 재림하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동시에 우리도 그와 같을 것이다. 그분이 가신 후 성령이 오셨다는 것은 성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우리와 함께 함을 의미한다. 만일 달리기 선수들처럼, 또 세대주의처럼 배턴을 그분들이 주고받았다고 상상하면 안 된다. 지역적으로 제한된 가운데 나타내신 하나님은 이제 언제나 변함없이 어디서나 하나님의 자녀와 함께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③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다는 의미는 “하늘과 땅의 피조물이 그분의 위엄을 우러러 보게 하고, 그분의 통치를 받게 하고, 권능에 복종케 한다”는 것이다(2권 16장 15항). 실제로 앉아있다고 상상해선 안 된다. 영원토록 하나님의 선택한 자를 위해 중보와 대언의 기도를 하신다는 의미다.

④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은 반드시 이뤄진다. 칼빈은 이 의미를 “마지막 날에 그분이 명시할 임재를 묵상하도록 독려하는데 있다”(2권 16장 17항)고 한다. 또 심판자이시기에 그리스도는 “나의 모든 적을 영원한 저주 가운데 던지”실 것이고, “선택된 모든 자와 함께 나를 자신에게로 데리고 가실” 것이다(<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 52문).


이상에서 보듯이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은 그분의 백성 또는 선택된 자에게는 놀라운 위로와 혜택이지만, 그렇지 않는 자에게는 이 진리가 공포와 위협이 될 것이다.

기독신문 기자  opinion@kido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