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존 오웬

내 안의 죄죽이기(3) / 존 오웬

새벽지기1 2016. 7. 12. 12:37


2. 죄를 죽이기 위해 힘써야 할 이유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골3:5)

 

이 편지의 수신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은 자(1절), 그분과 함께 죽은 자(3절), 그들의 생명이 그리스도이며 그분과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날 사람들이다(4절). 죄를 죽여라. 실로 죄를 죽이기 위해 매일 노력하라. 그리고 항상 살아 있는 동안 죄를 이기는 삶을 목표로 삼으라. 하루라도 이 일을 중단하지 말라. 죄를 계속 죽이지 않는다면 죄가 당신을 죽일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실제로 죽어서 그분을 통해 새 생명을 얻은 당신은 더 이상 이 의무를 회피할 수 없다.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요15:2).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9:27). 일반 성도들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바울도 그런 일을 매일매일 한다고 한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어떻게 그런 의무와 일들을 회피할 수 있겠는가?

 

우리 속에 지속적으로 거하는 죄의 잔존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죄는 항상 우리 속에는 거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속에 거하는 죄를 죽여야 할 책임이 있다. 우리가 죄를 안 짓고 온전하게 살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헛되고 거짓된 무지한 사람들이다. 더욱 영악하게 온전한 상태에서는 선과 악의 차이가 사라지게 된다고 까지 말한다. 그들이 말하는 완전함이란 사실상 가장 사악한 것이다. 그들은 육신의 허황된 생각으로 교만해져 복음과 상관없는 전혀 다른 의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성도들은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3:12).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4:16). 새 사람의 계속적인 변화로 인해 옛 것이 파괴되고 무너진다는 뜻이다.


영을 대항하는 육을 가진 탓에 우리는 원하는 바대로 모두 순종하지 못한다. 이 ‘사망의 몸’(롬7:24)인 우리의 육체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길은 오직 ‘우리의 낮음 몸이 변화되는’ 방법밖에 없다(빌3:21). 죄를 죽여야 할 의무가 있는 우리는 우리 속에 남아 있는 죄를 극복하기 위해 계속 노력해야 한다. 적을 물리쳐야 할 의무를 가진 사람이 적이 죽기도 전에 싸움터를 떠난다면 그는 자신의 의무를 온전히 수행한 것이 아니다(갈6:9,히12:1,고후7:1).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하는 죄의 활동성

 

죄는 우리 속에 거할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활동하여 육체의 행실을 행하도록 자극한다. 죄의 물줄기는 외관상 고요해 보이지만 그것은 조류의 움직임이 심한 매우 깊은 물이다.

또한 죄는 우리 속에 거할 뿐만 아니라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을 통해 우리의 마음의 법과 싸운다(롬7:23). 그래서 육체의 소욕이 성령을 거스른다(갈5:17). 욕심은 우리를 속이고 유혹하는 죄이다(약1:14). 욕심이 추구하는 목표는 악이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롬7:19). 내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기 때문이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5:17).


자신은 항상 하나님의 일을 하기 때문에 자신 속에 거하는 죄는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는가? 죄는 우리가 사는 동안 우리의 행동을 오염시키려고 발악을 한다. 그런 죄를 죽이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패배할 수밖에 없다. 죄는 교묘하고 강력하여 고삐를 늦추지 않고 호심탐탐 우리의 영혼을 죽이기 위해 기회를 엿본다. 우리의 날은 항상 죄가 이기든지 아니면 죄를 죽이든지 양자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믿음의 성인들은 죄로부터 해방된 후에도 죄로부터 피할 수 있는 도피처는 없으며, 죄와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죄는 항상 극단을 추구한다

 

우리가 죄를 계속적으로 죽이지 않고 방치한다면, 그것은 영혼을 파괴하는 더욱 더 큰 저주스런 수치를 가져다 준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갈5:19-21).

죄는 항상 극단을 추구한다. 즉, 우리를 유혹할 때 그 유혹과 같은 노선에서 가능한 한 더 큰 죄를 짓도록 유도한다. 그 결과 불결한 생각은 나중에 우상숭배가 되고, 탐심의 욕구는 탄압으로 변하게 된다. 죄는 우리 마음속에 정욕을 자극해서 그 경로를 통해 더욱 큰 죄의 최고봉에 오르도록 유도한다. 무덤과 같아서 결코 만족하는 법이 없다. 죄가 승리할 때 인간은 강퍅해져서 파멸하게 된다(히3:13).


죄의 행동과 속삭임은 처음에는 매우 대수롭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일단 우리의 마음 속에 그 뿌리를 내리면 죄는 계속해서 자신의 영역을 넓혀 더 큰 죄를 짓도록 유도한다. 죄의 최종 목표는 하나님을 포기하고 대적하도록 하는 데 있다. 죄의 거짓됨 때문에 그렇게 된다. 죄를 막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죄를 죽이는 방법밖에 없다. 그러므로 매 시간마다 죄의 뿌리를 마르게 하고 그것의 머리를 쳐서 그것이 지향하는 목표를 원천적으로 봉쇄해야 한다.

 

우리의 죄를 대적하는 성령

 

우리에게 성령과 새로운 품성이 주어지게 된 것은 죄와 그 욕심을 대적하기 위함이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라는 말 다음에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르나니”(갈5:17)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육체가 성령을 거스르는 것처럼 우리 속에 주어진 성령, 또는 새로운 영적 품성은 육체를 거스르는 성향이 있다는 것이다.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특권을 주셨다(벧후1:4-5). 우리 속에는 육체 속에 거하는 죄의 법뿐만 아니라 마음의 법이 생기게 된다(롬7:23). 이 두 개의 법이 싸울 때 마음의 법이 힘을 쓰지 못하도록 그것을 가두고 죄의 법을 자유롭게 활개 치도록 내버려 둔다면 그처럼 불합리하고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다.

이 영적 싸움은 우리의 삶과 영혼이 달려 있는 싸움이다. 매일매일 죄를 이기기 위해서 우리의 새로운 품성과 성령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최대 적과 대적하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훌륭한 자원을 경홀히 여기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이상 많은 것을 주시지 않는다.

 

의무를 소홀히 했을 때의 결과

 

이런 의무 태만은 우리 영혼을 사도 바울이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4:16)라고 말한 상태와 완전히 정반대가 되는 상황으로 만든다. 거꾸로 다윗의 집이 죄를 짓고 사울의 집이 은혜를 받는 형국이 되는 셈이다. 마음 속에 주어진 은혜를 잘 간직하기 위해서는 훈련과 성취라는 두 개의 축이 필요하다. 의무를 수행하지 않을 때 은혜는 시들게 되고 대신 죄의 욕망이 번성하게 된다. 그래서 마음이 점점 악화되고 강퍅하게 된다.


죄를 죽이는 의무를 태만히 함으로써 죄가 승리를 거두게 되면 우리의 영혼의 뼈는 쇠하게 되며(시31:10,51:8) 사람은 연약해져서 죽음의 자리에 이르게 된다(시40:12, 사33:24). 한때 겸손하고 상냥하며, 상한 심령을 갖고, 타인에게 무례를 범하지 않기 위해 애쓰며 주님의 계명에 열심을 가진 자라고 여겨졌던 크리스천들이 죄를 죽이는 의무를 소홀히 해서 결국 세상적이고 육적이며 차갑고 화를 잘 내며, 세상의 사람들과 사물에 동화되어 신앙을 저버리고 무서운 유혹에 빠져드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죄를 죽이려는 노력에는 두 극단이 있다. 한 극단은 굳은 결의로 죄를 이기려는 자세인데, 이것은 결국 율법적인 태도로 남의 흠을 잡고, 분노와 시기, 그리고 악독과 교만함을 낳는다. 또 다른 극단은 자유함과 은혜라는 핑계로 죄를 죽이는 일을 소홀히 하는 것이다. 진정한 복음적 입장은 이 양극단을 회피한다. 아쉽게도 오늘날 우리의 모습 속에는 이 중용의 입장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우리의 의무는 온전히 거룩해지는 것이다


우리의 의무는 주님을 두려워하면서 거룩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다(고후7:1). 우리는 매일 은혜 안에서 자라나야 하는 의무가 있다(벧전2:2). 그리고 매일의 삶에서 우리의 속사람은 새로워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후4:16). 하지만 이와 같은 의무들은 매일 죄를 죽이지 않고서는 결코 성취될 수 없다. 죄의 소욕을 억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거룩함에서 진보를 이룰 수 없다. 죄의 공세를 느끼지 못하고 죄를 이기기 위해 자신을 자제하지 않은 사람은 죄에 대해 죽었다기보다 죄와 타협한 사람이다.


제일 원리는 처음 회심해서 죄의 자각과 수치심을 느끼고 죄와 대항하는 새로운 원리를 마음속에 심어 죄를 이기는 보편적인 삶의 토대를 이루었다 할지라도 여전히 성도의 마음속에는 죄가 거하며 활동한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자칭 신앙인이라고 공언하는 일반 사람들의 삶을 보면 죄를 죽이는 자세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헛된 시간 낭비, 게으름, 비생산적인 자세, 시기, 싸움, 알력, 경쟁, 분노, 교만, 세속적인 생각, 이기심 등이 오늘날 크리스천의 지표가 되고 있다. 죄를 죽이지 않는 신앙인에게서 찾아 볼 수 있는 악은 무엇일까?

 

우리 자신에게 있는 악


죄를 죽이지 못하는 원인은 마음속에서 죄의 쓴 맛을 음미하지 않고 그 죄를 그대로 삼키기 때문이다. 은혜와 자비에 대한 생각에 자신의 상상력을 고정시켜 일상적인 죄에 대해서는 아무런 고통 없이 그대로 소화하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음탕한 것으로 바꾸고, 죄의 속임수로 인해 그 마음이 강퍅해지게 된다. 인간의 마음이 거짓되고 부패했다는 것을 이처럼 잘 보여주는 증거도 사실 없다.

 

타인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는 악

1) 죄를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도 선한 상태에 있다는 잘못된 선입관을 갖고, 자신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경우이다.

죄를 이기려는 노력이 없는 신앙인의 내부는 모두 오염되고 무가치한 것들이다. 죄를 죽이지 않는 사람들은 방탕함을 부인하지만 실제로 매우 세속적이다. 세상과 자신을 분리하면서 전적으로 자신만을 위해 살기 때문이다. 그들의 말은 영적이지만 실제의 삶은 빈껍데기에 불과하다.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해 언급하지만 철저히 세상과 영합한 삶을 영위한다. 죄로부터 용서받은 사실을 자랑할 뿐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


2) 죄를 죽이지 못한 신앙인들은 타인들에게 그들도 자신들과 같은 경지에 이르게 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잘못된 믿음을 심어 주어 그들을 속인다.

종교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외형적으로 높이려는 유혹에 빠지게 된다. 그럴지라도 결코 영생을 얻을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