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두려워하지 말고 능력과 사랑과 절제로 살라
우리 믿음 생활에서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이 비굴한 두려움이다.
두려워하는 마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마음’은 ‘영’이라고 성경 아랫 줄에 주를 달고 있다.
그것은 사탄이 주는 영과 마음이고 세상과 사람이 주는 마음이다.
우리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았다고 로마서는 말씀한다
(롬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두려워하는 영과 마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영과 마음을 주셨다. (복음의 능력)
능력의 영이란 곧 담대한 마음이며 확고한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살전 1:5)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잘못된 심리학적인 가르침 때문에 이 담대하고 확고한 마음을 잃고 말았다.
청교도신앙을 공부하면서 말씀을 통해 이 담대하고 확고한 마음을 되찾기 바란다.
능력의 영으로 주신 담대하고 확고한 마음을 가질 때 두려움을 이길 수 있다.
다윗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시57:7-8)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은 지금의 안정과 의존성이 깨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깨지고 잃으면 내 힘으로 세워야 하는데 엄두가 나질 않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안정과 의존성의 노예생활에서 한 발자국도 나서지 못한다.
거기에 아브라함에게 하신 명령이 떨어지면 뭐라고 응답할까?
‘고향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라구요?’.
‘하나님, 난요 죽어도 못해요. 차라리 죽으라고 하세요.’라고 할 것이다.
오늘 우리는 내가 무엇을 의지하고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지금 돈 벌어다 주는 사람을 제일 의지하고 있지는 않는지--.
지금의 환경을 오직 의지하고 있지 않는지--.
고향 친척 아버지집은 내가 의존하고 있는 모든 것을 말한다.
75세가 된 아브라함에게는 명령을 했고
아직 철이 안든 요셉에게는 강제로 하셨다.
하나님은 지금도, 철이 든 사랑에게는 명령을 하셔서 순종을 하게 하실 것이고
아직 철이 안든 사람에게는 강제로 하실 수 밖에 없으실 것이다.
가야 할 길이니까, 그러지 않고서는 자유와 가나안의 축복을 살 수 없을 것이니까.
성령을 부어주시는 것도 노예생활에서 해방시키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신다.
(사 61: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포로된 자는 자유하여야 하고, 갇힌 자는 놓여나야 한다.
그것이 성령 받은 자가 해야 할 일이다.
복음에 입각해서 진리를 기준으로 하여 당당하게 받을 것은 받고 줄 것은 주어야 한다.
내 인생에, 내 가정에,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질려면
돈 벌어온(도움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소유와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이 통치하도록 해야 한다.
폭군과 독재자의 횡포와 폭언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이 기준이 되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의 통치와 진리가 기준이 될 때 내 인생과 가정이 바로 설 수 있고
축복과 형통을 이룰 수 있다. 그것이 성경의 방법이다.
왜 못하는가?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두려워하고, 환경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두려워하면 평생 그 그늘, 그 환경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개처럼 줄에 묶여서 주는 밥먹고 꼬리치는 것으로 생을 보낼 수밖에 없다.
모세의 시종 노릇하던 여호수아에게 제일 먼저 요구하신 것이 무엇이었는가?
(수 1:9)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능력의 영, 담대하고 확고한 마음을 주셨음을 믿고
두려움을 극복하시기 바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주셨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영으로 우리는 사람과 환경에 대한 두려움을 이길 수 있다.
두려우면 염려와 근심과 걱정부터 하게 된다.
(빌 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사람과 환경에 준 마음이 두려움을 불러오고 노예근성을 키우게 된다.
사랑의 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사람이, 환경과 소유가, 내 마음을 차지하지 않도록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식으면 사람을 두려워하고 환경을 무서워하게 된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사람과 환경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음을 믿으라.
(요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고 주님은 오셨다.
(히 2:14-16)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 것이 복음이다.
(눅9:23-24)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절제(근신)하는 영’을 주셨다.
마음의 평온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평강으로 우리는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
염려와 걱정은 두려움으로부터 오는 우리의 상상의 산물들이다.
염려가 올 때마다 기도와 간구로 아뢰고, 절제하는 영으로 하나님의 평강으로 채우시라.
우리는 시간을 정해서 정기적으로 기도하고, 단순하고도 짧은 기도를 생활화해야 한다.
절제하는 영, 평온한 마음, 하나님의 평강으로 살기를 힘써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성령이 내주하여 계신다.
그 성령이 주시는 영과 마음이 바로 능력과 사랑과 절제이다.
확고하고 담대한 마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평온한 마음으로 두려움을 극복해야 한다.
그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을 가지고 두려움을 극복하고 사는 길로 나서야 한다.
우리는 이제 옛사람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옛사람의 습관과 사고방식을 헌옷 벗듯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벗어버려야 한다.
하는 만큼, 우리는 우리의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린 만큼 거룩함에 이르는 것이다.
(골 1;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견고하여 흔들리지 말고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너희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으리라.
2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해 고난을 받는 사람들을 부끄러워 말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지금 ‘주를 증언함과 주를 위하여’ 감옥에 갇혀 있다.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주를 증거하는 것과 주를 위해 고난 받는 것을 부끄러워 한다면,
그리스도께서도 후에 우리를 부끄러워 하실 것이다.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씀한다.
(롬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예수 믿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복음을 부끄러워 하는 것이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이 복음을 전파하셨고, 우리도 이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막1:14-15)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복음으로 인하여 고난받는 나 자신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한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복음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복음을 부끄러워하고, 복음으로 인해 오는 고난을 두려워한다.
가나안에 이르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곳이 광야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는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하는 것이 필수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잠시 받는 고난이 우리의 영원하고 중한 영광을 이룬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고난이 올 때마다 이 말씀들을 기억하면서 오직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야 한다.
내 힘만으로는 복음으로 인한 고난을 이겨낼 수 없다.
오랜 병환에 효자 없다고 고난이 장기화되면 사람들은 믿음에 파선하고 만다.
오직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고 오직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한다.
복음이 내 안에 없으면 고난을 이해할 수가 없게 된다.
고난은 복음으로 해석할 때만 의미가 있고 인내할 수 있고 소망을 붙들 수 있다.
성경을 열심히 공부함으로 복음을 알면 고난은 그렇게 두려울 것이 못된다.
오히려 고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다. 그 고난이 소망을 이루기 때문이다.
(롬5:3-5)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고난이 지속되는 가운데서도 고난의 목적을 알면 즐거워할 수 있다.
고난은 인내하는 가운데 연단을 통해 우리의 성결을 이루어가고
그 성결의 연단은 우리의 소망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은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셔서
우리의 소망을 부끄럽게 하지 않게 해주신다.
믿는다고 고백만 하면,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생각만 하면
고난 없이 우리의 소망을 이룬다는 형통신학과 믿음신학이 교회를 뒤흔들고 있지만
그런 거짓 철학과 속임수에, 그런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에, 넘어가지 마시기 바란다.
왜 그렇게 쉽게 교회와 성도들이 넘어가느냐?
그들에게 복음이 없기 때문이다.
복음을 통해 성령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근 100여년 동안 교회가 성경을 교리로 가르치는 일을 그만 두고
다른 복음을 전하여 왔기 때문이다.
오직 성령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한다.
그것이 부끄럽지 않은 소망과 영원한 영광을 이룰 것이다.
주님도 고난의 순종을 통하여 온전케 되심으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
(히5:8-9)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3 거룩하신 소명을 위해 살라
우리를 구원하신 구원의 복음은 우리 구주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것이다.
그분은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롬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하신 것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다.
오직 자기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로 하신 것이다.
거룩한 소명을 위해 구원하시고 부르신 것이다.
우리의 행위대로 부르신 것이 아니고 그분의 뜻과 계획에 따라 부르셨다면
우리는 그분이 부르신 거룩한 소명을 이루어가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구원의 목적은,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거룩한 소명을 위해서이다.
그 거룩한 소명을 이루기 위한 연단이 고난이다.
우리가 현재 땅위에서 하고 있는 일들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
그 일들을 통해서, 고난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거룩한 소명을 수행하기를 원하신다.
나에게 주신 거룩한 소명이 무엇인지는 말씀 공부를 통해서 깨달아 가야 한다.
기도하시는 가운데 환경 가운데서 성령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에 순종해야 한다.
바울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거룩한 소명을 받았다.
그가 고난을 받으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은
자기가 믿는 자를 알기 때문이고,
그분은 자기가 의탁한 것을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하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우리도 우리의 거룩한 소명을 알아가며, 바울의 이 자세를 본받아야 한다.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바른 교리를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 주신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마음으로
두려움을 극복하고 우리의 거룩한 소명을 이루어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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