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존 오웬

존 오웬의 성령론(2)

새벽지기1 2016. 5. 4. 23:35


복음을 파수하는 실천적, 논쟁적, 구원론적인 신학자로     


1644년, 오웬의 첫 목회지는 에섹스의 포드햄(Fordham)이라는 마을이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에섹스에서 상업도시인 코게샬(coggeshall)로 사역지를 옮기면서, 그곳 출신의 메리 루크(Mary Rooke)와 결혼했다. 오웬은 1646년 주일에 출석교인이 2천 명인 런던의 한 교회에 초빙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교회관의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장로교 제도보다 온건한 회중교회주의자가 되었다.

신학적 노선에 있어서 오웬과 당대의 청교도로 유명한 리챠드 백스터(Richard Baxter)와 존 호른(John Horne) 같은 탁월한 지도자들과 갈등이 있었다. 코게샬 (Coggeshall)에서 회중교회 목회를 하던 1648년, 오웬은 백스터와 논쟁을 하게 되는 데, 그의 저술이 상당히 반율법주의 경향을 담고 있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칼빈주의자들 사이에 아주 흔하게 벌어지던 논쟁이 바로 반율법주의 논쟁이다. 오웬은 “구원은 거룩하신 예수 안에서의 선택이다”(salus electorum, sanguis Jesu)을 발표하였다.


1648년 6월에 페어팩스(Fairfax) 장군은 콜체스터(Colchester)를 포위하였다. 그때 오웬은 군인들을 위한 설교 초청을 받았다. 그는 많은 장교들과 친분을 맺었는데, 그중에는 올리버 크롬웰의 사위인 헨리 아이어턴(Henry Ireton)도 있었다. 오웬의 은사는 곧 소문이 퍼져 의회에 초청을 받았고 의회에서 가장 선호하는 설교자가 되었다. 그는 올리버 크롬웰의 군종으로도 임명되었다. 그는 14년간 크롬웰과 함께 영국의 개혁에 동참하게 되었다. 크롬웰은 오웬을 데리고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로 데리고 다니면서 군인들에게 설교를 하게하고, 점령지의 종교적 상황을 판단하고 크롬웰의 정치를 신학적으로 뒷받침하도록 했다. 이러한 활약에 힘입어서 크롬웰에 의해 1651년 의회파가 승리한 후에 하원의 투표에 의해서 장로교회 지도자였던 레이놀즈 박사를 제치고 옥스퍼드 ‘그리스도의 교회’ (Christ's church) 교수회장으로 선임되었다. 오웬의 탁월한 행정력은 눈부신 업적을 남겨놓았으니, 최고의 학자들을 초빙하여 대학을 맡기고 경건과 신앙심의 고취는 물론, 일반 교육수준을 크게 높이는 등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많은 인재들이 큰 감동을 받고 배출되었다.


그는 마침내 크롬웰의 궁중목사가 되었다. 1652년,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의 부총장이 되었다. 다음해에는 성직자 임명과정을 감독하는 감독관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그가 부총장이라는 직책은 각종 행정을 책임지는 자리였다. 그는 6년간의 재직 기간에 신학, 설교, 교리문답, 기도를 중심으로 살았다. 오웬은 옥스퍼드 시절 여러 권의 설교집과 강의서, 논쟁적인 글들, 주석, 교리 연구서를 남겼는데, 그의 저작이 지니기 가치와 중요성은 실로 막대한 것이다. 옥스퍼드의 질서는 약한 편이었지만, 오웬은 관대하면서도 확고했기 때문에 효과적인 행정을 할 수 있었다.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는데 토론 때 한 학생이 상스런 말을 하였고, 그는 경고를 받았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자 오웬 자신이 그 학생을 힘으로 강의실에서 밖으로 내쫓았다고 한다.


오웬이 옥스퍼드를 떠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당시 대학의 행정자들을 지배하고 있던 대주교 윌리엄 로드 (William Laud) 가 로마가톨릭에서 내려온 온갖 미신적인 장식과 가톨릭적인 의식을 강요하면서, 거기에다가 새로운 수리를 하면서 온갖 장식을 고치고, 새 동상을 세우자는 고압적인 압력을 행사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청교도들의 분위기는 반발하려는 기운이 감돌자, 젊은 오웬은 가장 앞장서서 이러한 정치 목사의 행태에 비판을 가하고 강력히 거부하는 운동을 전개한 나머지, 학교의 설교목사직과 강사직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로부터 청교도들은 ‘신성의 특권’과 ‘고상한 양심의 자유’를 침해한 행동이라거나, 마땅히 거부해야할 인간의 명령에 대해서는 철저히 거부해 오고 있었다. 화형 속에서도 굴하지 않았던 리들리(Ridley)와 라티머 (Latimer) 목사를 높이 추앙해 왔던 것이다. 대주교 로드(William Laud)는 상하 구조의 국가체제를 따르는 ‘고교회’ (High church)주의자였다.1)

1657년, 전제정치를 실현하려는 크롬웰의 욕망에 반대하여, 오웬은 크롬웰과 결별하게 된다.2) 


청교도 운동의 최전선에 우뚝 선 칼빈주의 신학자   

                                     

1658년, 오웬은 회중교회의 목회자 모임에 나갔다. 이 모임은 런던의 사보이 궁(Savoy Palace)에서 열렸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기초한 고백서를 준비하기 위해서 토마스 굳윈, 필립 나이, 윌리엄 브리지, 윌리엄 그린 힐, 조셉 카릴과 함께 대표로 임명되었다. 이것이 나중에 알려진 사보이 선언(The Savoy Declaration)이다. 청교도 신학의 절정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3)인데, 여기에 참여한 많은 신학자들 가운데서 가장 탁월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존 오웬이었다. 1658년 사보이에서 독립교회 지도자들의 모임을 주선하고, 신앙고백서를 따로 작성하고, 오웬이 서문을 썼다. 그러나 1660년 올리버 크롬웰의 죽음으로 인해서 오웬의 생애는 급작스런 변화를 겪게 되는데, 부총장의 자리는 다시 레이놀즈 박사로 교체되었다.

 

신대륙 미국에서 장로교회가 회중교회를 핍박하는 일이 발생하자 이를 격렬하게 항의하였고, 하버드대학교의 총장으로 부름을 받았을 때에도 이를 지적하면서 거부하였다. 더구나 오웬의 철저한 비타협적 자세와 다른 독립주의자들의 입장으로 인해서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당대 영국에서 교회를 장악하고 있던 인물들은 거의 다 칼빈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장로교회 제도를 바꾸게 하거나 근본적으로 수정하도록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올리버 크롬웰이 사망하면서 장로교도들이 찰스 2세를 다시 불러들여 왕정복고를 이루는 과정에서 독립파는 불리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장로교를 국교로 삼겠다고 약속했던 찰스는 오히려 청교도를 핍박하기에 이르면서 이전과는 모든 상황들이 다르게 전게 되었다. 그는 약10년 동안 옥스퍼드 교수와 목사로서 최선을 다하였다. 1660년 3월 13일에는 감옥에 갇혀있던 존 번연 목사의 석방을 위하여 노력한 일로 인하여 다시 한번 고향 스타드햄튼의 교회로 물러나게 된다. 1662년 ‘통일령’(The Act of Uniformity)4)으로 2,000여명의 청교도 목사들이 강단에서 추방되었을 때, 오웬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후 핍박이 계속되는 동안 핍박에 굴하지 않고 오웬의 저항도 계속되었다.


1673년, 그동안 장로교회와 독립파 회중교회의 목사들은 각 교구에서 자주 대립하였는데, 리챠드 백스터의 제안으로 장로교회와 독립교회가 연합하자는 운동에 오웬이 적극적인 노력으로 많은 많은 갈등이 해소되었다. 백스터는 그동안 오웬의 비타협적 독립교회 제도에 철저히 반대하여오던 지도자였다. 오웬은 가톨릭식으로 상하관계가 형성되는 교회의 교구제도에 극렬히 반대하였다. 한 교구 내에는 그 지역을 담당하는 하나의 교회만을 세우되, 이를 노회 단위로 모이게 하는 일에도 반대한 것이다. 개신교 진영의 교회들이 연합하는 일은 매우 절실하였던 과제였고, 공적인 일에 항상 관여하여 왔던 그는 즉각적으로 환영하며 참여하였다. 하지만, 1571년 의회는 비국교도들에게 관용을 허용치 않는다고 발표하여 고난과 어려움을 안겨 주었다.

 

1660년 왕정복고 이후 그의 남은 인생을 반 추방형식으로 집에서 지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그 기간은 목사요, 설교가로서 오웬의 문서 활동이 크게 증가하는 시기였고, 그의 저술은 우리 세대의 청교도 비국교도주의 사상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탁월한 하나님의 사람 오웬은 우리들이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고난을 겪었다. 그는 메리 루크(Mary Rooke)와 결혼 후 31년간 11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딸아이 하나만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았고 나머지는 모두 일찍 죽었다. 그나마 살아남은 딸의 결혼도 깨어져서 친정에 돌아와서 산 지 얼마 안 되어 결핵으로 사망했다. 오웬은 1676년 훌륭한 그의 아내 메리 루크를 잃었다. 그는 18개월 후 재혼을 하였다.

 

그는 80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1647년에 그의 모든 저작 중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인 “그리스도의 죽음에 있어서 죽음의 죽음”을 간행하였다. 이것은 난공불락의 책으로, 속죄에 대한 고전적이고 개혁주의적인 진술로 인정을 받았다. 1677-8년에 그는 기념비적인 “성령론”의 전반 두 부분을 간행하였다. 1681년에 그는 3편의 고전적인 논문을 썼다. “그리스도론”,“신령한 마음의 은혜와 직무”, “그리스도의 영광에 관한 묵상과 강화”가 그것이다.    

 

1656년에 그는 “신자 안에 있는 죄 죽임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저서를 출간하였다. 이 책으로 인해 많은 신자들로부터 찬사와 감사를 받았다. 인간 영혼의 분석을 통찰력 있게 묘사하였다. 오웬은 로마서 8장13절에 근거하여 이 논문을 썼는데, 철처한 탐사를 통하여 우리 속에 감추인 동기와 정욕과 본능과의 싸움을 선언한다. 1658년에 그 뒤이어서 “유혹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또 하나의 책을 출간하였다. 그 책은 그들이 권력을 잡은 때에, 교묘한 도덕적 부패에 대하여, 잠복해 있는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그들을 경계한다. 1668년에 그는 많은 책을 내었는데, 특히 “내재하는 죄”라는 책이 주목을 끌었다. 이것은 시편 130편을 강해한 것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마친 후에                                       


  존 오웬 (John Owen)은 뜨거운 가슴으로 사역했던 목회자였다. 그의 거룩한 영혼은 하나님만을 더욱 더 즐거워했고, 건장했던 그의 육체는 완전히 쇠잔해졌다. 잦은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고된 업무로 인해서 완전히 탈진 상태에 빠진 것도 여려 차례였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했다.5)  70세에 못 미치는 그의 전 생애를 쉼이 없는 학문 연구와 목회자로서의 열정적인 삶에 바친 결과, 말년에 담석증과 천식으로 고생하다가 67세를 넘긴 1683년 8월 24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런던 번 힐 묘지에 묻힘으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

  "나는 교회라는 배를 폭풍의 바다에 두고 떠납니다. 그러나 위대한 선장이신 하나님이 계시기에, 배 밑창에서 노 젓는 나 같은 사공 한 사람이 사라진들 문제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라는 위로의 유언을 남기고 오웬은 이 땅을 떠났다. 그러나 당대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이자 목회자였을 뿐 아니라 아직까지도 가장 영향력 있는 청교도 중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고 있다.

그는 어디서나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긴 인격자로 알려져 있다. 청교도 시대의 신학과 신앙을 연구하는 많은 이들은 오웬을 가리켜 '최후의 청교도 신학자'로, 그리고 종교개혁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장 심오한 신학 저서를 방대하게 내놓은 저술가로 평가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오웬의 전집을 독파했던 패커는 그를 일컬어 “성경에서 파악된 인류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들을 드러내는 진실함, 당당함, 그리고 위엄에 있어서 필적할 사람이 없는‘ 사람으로 평한바 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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