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존 칼빈

칼빈의 경건관(교회론 영역) / 조엘 비키

새벽지기1 2016. 4. 2. 15:27


칼빈이 말하는 경건은 성경이나 교회와 독립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두고 교회 안에서 자라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다른 이익 단체들보다 교회를 더 좋아하지 않는다면, 교회의 지체로 간주되는 것이 무가치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를 어머니로 갖는 것을 거부하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질 수 없다”고 말했다. 칼빈은 거기에 덧붙인다. “교회라고 하는 어머니가 자신의 태 안에 우리를 잉태하고 탄생시키고 가슴으로 먹이지 않는다면, 그리고 결국은 죽을 수밖에 없는 육신을 벗어 버리고 천사들처럼 될 때까지 그 보호와 인도 아래 우리를 두지 아니하면, 생명에 들어갈 다른 길은 없기 때문이다.”

교회가 없으면, 죄사함이나 구원에 대한 소망도 거의 없다고 칼빈은 썼다. 따라서 교회를 떠나는 것은 항상 재앙이다.

 

칼빈에 따르면, 영적 성장은 교회 안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신자는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에 접붙여진다. 교회는 모든 신자의 어머니이자 교육자, 양육자다. 왜냐하면 성령이 교회 안에서 활동하시기 때문이다. 신자는 죽을 때까지 교회를 졸업하지 않는다. 이 평생 교육은 그리스도의 지도 아래 신자들이 서로 사랑하고 보살피는 참된 경건의 분위기 속에서 제공된다.

경건의 성장은 교회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경건은 성도들의 교제로 길러지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서 신자들은 “은사를 서로 나눔으로 굳게 결합한다.” 각 지체는, 몸 안에서 이 은사를 균형과 조화 속에서 사용하고, 그렇게 함으로 완전을 향해 개혁되고 자라 간다. 34

 

말씀에 대한 경건

 

하나님의 말씀은 신자의 경건을 자라게 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칼빈의 관계모델은 그 방법을 잘 설명해 준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대화다. 하나님이 시작하시는 대화의 한 부분이 ‘계시’다. 계시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고 우리에게 전하기 위해 내려오셔서 말씀 선포를 통해 우리에게 자신을 알려 주신다. 이 대화의 또다른 부분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다. 신뢰, 경배, 경건한 두려움 등으로 이루어진 이 반응을 칼빈은 경건이라고 부른다. 말씀 선포를 통해 우리는 구원을 받고 보존을 받는다. 왜냐하면 말씀이 선포될 때,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피를 의존하고 공경하는 사랑으로 그리스도께 반응하도록 역사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칼빈은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에게 성령의 능력을 주심으로 “성도가 새롭게 되고,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진다”고 말한다.

 

칼빈은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우리의 영적 양식이자 영적 건강을 위한 약이라고 가르친다.

성령의 복과 함께, 사역자들은 의사들이 우리의 몸에 약을 처방하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에 말씀을 처방하는 영적 의사다. 이 영적 의사들은 말씀을 사용하여, 죄와 사망에 붙잡혀 있는 사람들의 영적 질병을 진단하고 처방하고 치료한다. 선포된 말씀은 병에 걸리기 쉬운 영혼들을 고치고 깨끗하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성령 곧 “내부 사역자”는 “외부 사역자”인 설교자를 사용하여 말씀을 선포함으로서 경건을 촉진시킨다.

 

성령은 복음을 사용하여 택함 받은 자들의 영혼 속에서 신앙을 더 깊게 하실 뿐만 아니라 율법을 사용하여 경건을 촉진시키신다. 율법은 세 가지 면에서 경건을 촉진시킨다.

1 율법은 교회의 사회에서 죄를 억제시키고 의를 촉진한다. 교회와 사회의 혼란을 예방한다.

2 율법은 우리를 훈계하고 교육하고 참회하게 하고,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서 벗어나 율법의 완성자이자 목적이신 그리스도께 나아가도록 이끈다.

3 율법은 신자에게 삶의 규칙이 된다.

 

율법은 우리 육신에 대해 게으르고 고집센 나귀를 채찍으로 쳐서 일어나 일터로 향하게 하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한다. <기독교강요> 최종판에서 칼빈은 신자들이 어떻게 율법으로부터 유익을 얻는지 더욱 상세히 다룬다.

1 “율법은 신자들이 사모하는 주님의 뜻의 본질을 날마다 더 철저하게 배우도록 해주며, 또한 그 뜻을 깨닫고 있음을 확증해 주는 최고의 도구가 된다.”

2 “율법은 자주 묵상하면 율법에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 그 안에서 강건해지며 미끄러지는 죄악의 길에서 돌아서게 된다.”

 

성례속의 경건

 

칼빈은 성례를 “우리를 향한 신적 은혜의 증거를 외형적인 증표로 확증하고,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경건을 상호간 인증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성례는 “경건의 표현”이다. 성례는 우리의 신앙을 자라게 하고 강화시키며, 하나님께 산 제사로 우리 자신을 드리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아우구스티누스와 마찬가지로 칼빈에게도, 성례는 가시적인 말씀이다. 선포된 말씀은 우리의 귀를 통해 임하고, 가시적인 말씀은 우리의 눈을 통해 임한다. 성례는 선포된 말씀과 동일하게 그리스도를 제시하지만, 방식만 다르게 그분을 전하는 것이다.

 

칼빈은 성찬을 영혼의 양식으로 말하기를 좋아한다.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부터 우리가 받는 보이지 않는 양식의 표지이다“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우리 영혼의 유일한 양식이고, 그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그리스도에게 참여하여 새로운 힘을 얻도록 우리를 그리스도께 초대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천국의 불멸성을 얻을 때까지 계속해서 힘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자라고 발전해야 한다. 우리는 옛 본성으로 인하여 계속 죄를 범하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용서와 은혜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말씀선포와 함께 성찬은 지속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필요로 한다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고, 세워져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성례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받아 주시고 우리에게 복을 베푸시고 우리를 새롭게 하신다고 약속한다. 성찬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나아와 “내 몸을 계속 너희에게 주겠다. 믿음으로 너희는 나와 내 몸과 내 몸이 주는 모든 구원의 유익을 공유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칼빈은 성찬에서 그리스도는 천국을 떠나 떡 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성찬에서 우리는 마음으로 그리스도가 계시는 천국을 올려다 보도록 요구받는다. 그리스도가 외적인 떡과 포도주에 결합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떡 속에 계시지 않기 때문에 떡을 예배해서는 안 되고, 떡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칼빈은 말한다. 우리는 성례를 통해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은혜 안에서 자라간다. 이것이 성례를 은혜의 수단으로 부르는 이유다. 성례는 천국을 향해 나아가도록 우리에게 힘을 준다. 성례는 그리스도께서 “서명하고 인친” 대속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를 촉진시킨다. 성례는 성령께서 성례속에 각인되어 있는 말씀을 “볼 ” 수 있도록 할 때, 신자에게 “양심의 평안”과 “특별한 확신”을 제공한다.

 

성례는 우리로 하여금 충만한 은혜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을 돌리도록 자극함으로써 경건을 촉진시킨다. 성찬에서는 두 가지 일이 일어난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받아 주심이고, 다른 하나는 신자의 복종이다. 성찬은 참여자들이 서로 소중히 여기고 그리스도의 몸에 하나로 연합되어 서로 간에 형성된 유대를 증언하는 아가페의 잔치다. 브라이언 게리쉬가 말한 것처럼, 성찬은 은혜의 경건과 감사의 경건을 동시에 촉진시킨다. 칼빈은 권면하기를 “우리는 범사에 전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영예롭게 함으로써 감사로 충만한 경건과 불타는 사랑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크게 공경해야 한다”고 했다. 성찬은 칼빈의 경건의 심장부에 있는 은혜와 감사라는 주제를 의식의 시행을 통해 표현하는 것이다.

 

시편 찬송에 나타나 있는 경건

 

칼빈은 시편을 경건의 표준서로 간주한다. “시편 만큼 하나님을 찬양하는 올바른 방법을 더 온전히 가르쳐주거나 경건을 행사하는 데 더 강력한 자극을 주는 성경의 다른 책은 없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계시로서 시편은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해 가르친다. 시편은 참된 경건을 가르치고 자극한다. 시편은 신학이면서 동시에 찬송가이기 때문에 노래로 부르는 신조다. 시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필요성을 가르친다. 시편은 우리의 필요를 해결하는 하나님의 대책을 제시한다. 시편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인자하심을 예증하고,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묵상하는 길로 초대한다. 시편은 신앙과 불신앙, 하나님 안에서의 기쁨과 죄에 대한 슬픔, 신적 임재와 신적 유기를 비롯한 온갖 범주의 영적 경험을 망라하고 있다. 시편은 “영혼의 모든 부분에 대한 해부학”이다.

 

칼빈은 주석자, 설교자, 성경학자, 예배 인도자로서 25년동안 시편에 흠뻑 빠져 있었다. 초기에 칼빈은 공중 예배에 사용하기 위해 시편의 찬송화 작업을 시작했다. <제네바 시편 찬송>은 특별히 당대에 가장 유명한 음악가였던 루이스 부르주아가 곡을 붙인 125편의 휼륭한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곡들은 가락이 아름답고 독특하고 경건하다. 이것은 예배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옹호하고, 신자의 내적 성향과 외적 고백 간의 적절한 일치를 이끌어 낸다.

 

칼빈은 함께 모여 찬송하는 것은 부패한 심령을 진정시키고 경건의 길을 가는 데 완고한 감정을 억제한다고 믿었다. 시편을 노래하는 것은 말씀이 마음에 미치는 영향력을 증대시키고, 교회의 영적 힘을 배가시킨다. “시편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들어 올리도록 자극하고, 하나님 이름의 영광을 자극할 뿐만 아니라 높이고 찬송하는 열정을 야기시킨다.”

 

<제네바 시편 찬송>은 공동체적이고 전례적임 말씀, 전례와 삶 사이의 구별을 제거하는 열성을 자극함으로써 경건을 촉진시켰다. 칼빈주의자들은 시편을 교회에서만이 아니라 가정과 일터, 거리와 들판에서도 자유롭게 노래로 불렀다. 시편을 노래하는 것은 “위그노 교도들에게는 자기증명의 수단”이 되었다. 이 경건한 실천은 문화의 상징이 되었다. 하틀리 홀, “성경적 또는 운율적 형태로 된 시편을 이전에 존재하고 있던 경건한 곡조에 맞추어 노래로 부르는 것은 분명히 개혁파 경건의 심장이자 영혼이다.”

 

- 조엘 비키, 『개혁주의 청교도 영성』, pp 33-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