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요한이 본 하늘( 계시록4:1-11)

새벽지기1 2015. 12. 2. 06:23

 

1장에서 요한은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되어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큰 음성이 들려준 이야기는 일곱 교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요한은 자기가 들은 일곱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2-3장에 걸쳐서 풀어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요한은 하늘을 보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동시에 전에 들었던 나팔소리 같은 음성이 또 들려왔습니다.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계4:1). 요한은 이 음성의 초청을 받음과 동시에 하늘 세계를 보게 되었습니다.

 

요한이 본 하늘 세계는 이러했습니다. 하늘에는 보좌가 있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권위를 뜻하는 보좌가 하늘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분이 계셨습니다. 요한은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말하지는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그분의 이름을 적시하지도 않습니다. 요한은 단지 앉으신 분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았다고 말합니다.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보좌 주위에는 또 다른 보좌 스물 네 개가 있고, 그 보좌에는 이십사 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아 있었습니다. 중앙에 있는 보좌로부터는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났고, 보좌 앞에는 일곱 개의 등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보좌 앞에는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들이 가득했습니다. 이 네 생물들은 밤낮 쉬지 않고 보좌에 앉으신 분을 찬양했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정차 오실 이시라.”(계4:8)라고 찬양하며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릴 때에 이십사 장로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함께 경배했습니다.

 

이것이 요한이 본 하늘 장면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시시한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공상만화에 나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 같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알 것 같기도 하고,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펴보면 참 난해해 보이기도 합니다. 확실한 건 이겁니다. 하늘이 참 영광으로 가득하다는 것, 하나님의 왕 되심이 강조되어 있다는 것, 이십사 장도들과 네 생물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고 있다는 것, 이것은 어느 정도 확실해 보입니다. 그런데 보석들과 무지개는 뭘 뜻하는 건지, 이십사 장로들은 뭘 나타내는 건지, 네 생물들과 각각의 형상들은 뭘 의미하는 건지, 여섯 날개와 수많은 눈들은 무슨 뜻인지는 좀 난해하고 모호합니다. 여러 가지 숫자도 의미 분석이 잘 안 되고, 여섯 날개가 있고 수많은 눈이 반득이는 괴이한 네 생물들도 정말 괴이하게만 느껴집니다. 또 요한이 본 하늘에 대해서 갖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여러분, 요한이 본 하늘은 어떤 곳일까요? 정말 실재하는 곳일까요? 아니면 단지 환상일까요? 오늘은 이 하늘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늘’이라는 말은 성경에 많이 나오는 단어 중에 하나입니다. 주님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했습니다(마6:10). 또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고 했습니다(마6:19-20). 바울은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고 했고(빌3:20), 하나님께서는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고 했습니다(엡2:6).

요한은 바로 이 하늘을 보았습니다. 요한뿐 아닙니다. 바울도 하늘을 보았습니다.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하늘을 본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고후12:2-4). 바울이 하늘에서 들은 말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몸을 입은 채 일어났는지, 몸을 떠나서 일어났는지조차도 자기로서는 알 길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하늘을 본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첫 번째 순교자인 스데반도 하늘을 보았습니다. 그가 죽임을 당할 때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보았는데, 하늘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 또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행7:56). 예수님은 하늘을 보았다는 구체적인 경험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좌우에 함께 달린 행악자 중 한 사람이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고 말씀하심으로써 우리가 이 땅에서 경험하는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실재한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표현하셨습니다.

 

이런 성경의 증언들을 통해 볼 때 요한이 하늘을 본 것이 환상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실재하지 않는 것을 보았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요한은 실제로 존재하는 하늘 세계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하늘’은 우리에게 너무 막연하고 막막합니다. 하늘은 그저 죽은 후에나 들어가는 천상의 세계이려니 라고 접어두거나, 하늘 위에 또 다른 하늘이 있나보다 라고 상상하는 게 고작입니다. 하늘이 어떤 곳일까를 아무리 상상해보아도 감이 잡히질 않습니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리얼리티(reality)가 확보되지 않습니다. 요한이 종말론적 미래에나 있는 하늘나라를 미리 가서 본 것도 아니고, 꿈을 꾼 것도 아니고, 없는 걸 본 게 아니라 있는 걸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하늘세계의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들은 요한이 하늘을 본 것을 환상을 본 것으로 처리하거나, 은유라고 처리해버리기도 합니다.

 

여러분,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왜 실재하는 하늘이 실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될까요? 왜 하늘의 현실성이 확보되지 않는 것일까요? 우리의 뇌가 우리의 감각과 경험의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문제를 좀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승천 문제를 생각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몸으로 40일 동안 이 땅에 계시다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이것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다 인정하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대목으로 가면 매우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예수님의 부활까지는 다 역사적 사실로 인식하고 받아들이는데 승천 이후로 가면 더 이상 역사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쉽게 말하면 이런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부활의 몸을 가지고 승천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부활의 몸 그대로 구름 너머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후 우리의 의식 속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승천 이후에는 부활의 몸이 없어져버립니다. 확인해볼까요? 여러분은 예수님이 지금 어디에 존재하신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신다고 생각하시지요? 그렇다면 어떤 모습으로 계신다고 생각하십니까? 부활의 몸으로요? 그렇게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은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이 영으로 보좌에 계신 것처럼 예수님도 영으로 보좌 우편에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논리적으로 따져 보면 이건 명백히 모순입니다. 부활의 몸을 갖고 승천을 하셨는데 승천 이후에는 몸이 아니라 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명백한 모순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런 모순이 의식 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승천 이전까지는 우리의 의식이 역사적이었다가 승천 이후에는 초역사적이고 초현실적인 시각으로 변해버리는 것입니다. 부활의 몸이 갑자기 사라져버리는 초역사적이고 초현실적인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사실은 승천 이후에도 부활의 몸이 존재해야 마땅합니다. 그것이 논리적으로 맞습니다. 그런데 승천과 함께 우리의 의식 속에서는 부활의 몸이 사라져버립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뇌가 감각과 경험의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뇌라는 게 참 신기하고 놀랍습니다. 몸의 일부밖에 안 되는 지극히 작은 것에 불과하지만 쉽게 정복하기 어려운 신비 덩어리입니다. 하지만 뇌는 어쩔 수 없이 물질적인 것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눈에서 사라지면 의식에서도 사라지는 오류에 빠지기 쉽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이 승천하기 전까지는 부활의 몸이 우리가 살고 있는 시공간 속에 있었습니다. 사람이 눈으로 보고 함께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승천 이후에는 어떻게 됐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의 몸은 더 이상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시공간 속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스킨십도 할 수 없고, 함께 울고 웃을 수도 없습니다.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게 되니까 우리의 의식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은 차마 부정할 수 없고, 몸은 보이지 않으니까 의식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스스로 착각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몸 없이 존재하신다는 착각. 몸 없이 존재한다는 착각을 해야 예수님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 몸 없이 존재한다는 착각을 만들어 내는 겁니다.

여러분 혼동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바람이나 연기처럼 홀연히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부활을 증명하기 위해서 잠시 몸을 입었다가 몸을 벗어버린 것도 아닙니다. 제자들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하셨던 그 몸, 손과 발에 난 못 자국을 보여주셨던 그 몸 그대로 하늘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이천 년이 지난 지금도 부활의 몸 그대로 하늘에 계십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의 몸 그대로 하늘에 계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활의 몸 없이 하늘에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하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의 몸으로 계신 곳이 하늘입니다. 그렇다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실재이듯이 하늘도 실재이어야 합니다. 가상의 세계일 수도 없고, 영의 세계일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존재가 실재(reality)이듯이 예수님이 부활의 몸으로 계신 하늘 또한 실재하는 세계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부활의 몸이 없다고 비역사적이고 비실제적인 사고를 하는 것처럼 하늘에 대해서도 비역사적이고 비실제적인 사고를 합니다. 알 수 없는 혼돈과 신비의 영역으로 내던져버린 채 눈에 보이는 세계 내의 현실에만 코를 박고 삽니다.

 

그러면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봅시다. 요한이나 바울이 본 ‘하늘’은 어떤 곳일까요? 성경이 말하는 ‘하늘’, 부활하신 예수님이 계신 ‘하늘’은 과연 어떤 곳일까요? 별들이 빛나는 하늘, 우주선이 날아간 우주 공간으로서의 하늘이 아니라는 건 분명하고, 또 가상의 세계가 아니라는 것도 분명한데, 그렇다면 요한이 본 하늘은 어떤 곳일까요? 우리가 살고 있는 불완전한 세상 너머에 있는 또 하나의 완전한 어떤 세계일까요? 아니면 영적인 존재들만 거하는 영의 세계일까요? 물론 성경이 말하는 ‘하늘’에는 공간으로서의 하늘도 있고, 하나님을 표현하거나 영적인 삶을 표현하는 은유로서의 하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나 바울이 본 ‘하늘’은 공간(sky)도 아니고 은유도 아닙니다. 가상의 세계는 더더욱 아닙니다. 요한이 본 하늘은 은유도 아니고 공간도 아닌 ‘하늘’입니다.

 

신약 신학자 톰 라이트의 설명을 들어봅시다. “성경이 하늘과 땅을 이야기할 때는 같은 시공간 연속체 안에 있는 서로 연결된 두 개의 지역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며, 비물질적 세계와 물질적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공간이라고 부르는 것의 두 가지 다른 종류, 우리가 물질이라고 부르는 것의 두 가지 다른 종류, 우리가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의 두 가지 다른 종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마침내 드러난 하나님나라. 192쪽). 설명이 좀 어렵지요?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하늘을 비물질적이고 비공간적이고 비시간적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하늘도 엄연히 물질적이고 공간적이고 시간적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단서가 붙습니다. 하늘도 공간은 공간인데 우리가 생각하는 공간은 아니고, 물질은 물질인데 우리가 생각하는 물질은 아니고(부활체), 시간은 시간인데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은 아니라(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시간)는 겁니다. 이렇게 설명해도 어렵긴 마찬가지입니다만 그렇게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이번에는 하늘과 땅의 관계성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예수님의 승천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승천에는 양면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편에는 그분의 부재가 있습니다. 이 땅에서 승천 하셨기 때문에 그분은 지금 이 땅에 없습니다. 그러나 또 한 편에는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 땅을 떠나 하늘로 가셨지만 그분은 여전히 부활의 몸을 가진 분으로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있겠다’(마28:20)고 약속하신대로 그분은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이 땅에 없지만 그분은 이 땅에 함께 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늘과 땅의 관계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늘과 땅은 서로 다르지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톰 라이트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승천을 통해 우리가 정확하게 이해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간과 우리의 공간 - 다시 말해서 하늘과 땅-은 비록 매우 다르지만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공간과 우리의 공간은 서로 맞물려 있고 교차하는데, 심지어 그 두 개가 각각 구분되는(적어도 지금은 구분되는) 정체성과 역할을 유지하는 동안에도 마찬가지로 서로 맞물려 있고 교차한다.”(마침내 드러난 하나님나라. 193쪽). 매우 정확한 설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늘과 땅은 지금 구분되어 있습니다. 정체성이 다르고 역할도 다릅니다. 또한 서로에게 닫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땅에서 하늘을 제대로 인식할 수가 없습니다.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인식할 수밖에 없고, 부분적으로 알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늘과 땅은 구분되어 있지만 서로 맞물려 있습니다. 서로 교차하고 있습니다. 바울이나 요한이 하늘을 볼 수 있었던 것도 하늘과 땅이 서로 맞물려 있기 때문이고, 하늘에 계신 주님이 일곱 교회의 모든 사정을 속속들이 다 알고 계셨던 것도 하늘과 땅이 서로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요한이 본 ‘하늘’과 하나님나라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요한이 본 ‘하늘’이 곧 하나님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영원히 살게 될 하나님나라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이 본 ‘하늘’과 하나님나라는 다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요한이 본 ‘하늘’은 땅과 구분된 하늘입니다. 땅과 하늘 사이에 뒤틀림과 균열이 있는 하늘입니다. 그러나 종말에 임할 하나님나라는 그런 하늘이 아닙니다. 종말에 임할 하나님나라는 바울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10)고 말했던 바로 그 세계입니다. 사실입니다. 바울이 증언한 것처럼 때가 되면 하늘과 땅이 새로운 방식으로 합쳐질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도 빠짐없이 함께 어우러지는 그런 세계가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어떤 닫힘도 없는 세계, 지금처럼 거울로 보는 것처럼 보는 게 아니라 얼굴과 얼굴을 보는 것처럼 볼 수 있는 세계가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 세계가 하나님나라입니다. 요한이 본 ’하늘‘은 하늘과 땅이 서로 맞물려 있기는 하지만 아직은 완전히 열려 있지 않고 닫힌 부분이 많은 그런 세계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나라는 그런 닫힘이 전혀 없습니다. 하늘과 땅이 완전히 동고동락합니다. 전혀 다르지요. 요한도 그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본 ‘하늘’과 마지막 날에 임할 하나님나라가 다르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새 하늘’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계21:1).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을 알고 신뢰하며 예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충분히 알지는 못합니다. 아니요. 충분히 알지 못하는 게 아니라 눈곱만큼 밖에 알지 못합니다. 하늘도 그렇습니다. 요한이 하늘을 보았다고 해도 하늘을 충분히 알지는 못합니다. 하늘이 땅과 맞물려 있다고 해도 아직은 우리에게 닫힌 세계, 우리의 감각과 인식 너머의 세계이기 때문에 충분히 인식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상상하기도 어렵고 구체적으로 이해하기도 어렵습니다. 사실 상상하는 것 자체가 잘 안됩니다. 상상하는 것 자체가 어려울 만큼 하늘은 우리에게 가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있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하늘은 실재합니다. 단지 실재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실은 거기가 이 땅을 경영하는 최고상령부입니다. 그러니 요한이 본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늘의 뜻을 받들어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땅만 바라보며 살아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땅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땅에서의 승부에만 집착해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땅이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땅도 중요하지만 하늘도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만 더 드리겠습니다. 하늘을 통해서 땅을 보고, 땅을 통해서 하늘을 보며 인생길 걸어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