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신실한 교회(요한계시록3:7-13)

새벽지기1 2015. 12. 1. 10:47

빌라델비아교회는 서머나교회와 함께 주님의 책망을 듣지 않은 교회입니다. 빌라델비아에는 아데미, 제우스, 아프로디테 등 여러 신의 신전이 있었고, 서머나교회처럼 빌라델비아교회도 유대인들의 공동체인 회당으로부터 완전히 추방되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주님은 단지 이 교회를 향해 매우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v.8). 참으로 엄청난 약속이고, 확고부동한 선포입니다.

여기서 주님은 다윗의 열쇠를 가진 분으로,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께서 빌라델비아교회 앞에 열린 문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그 문을 닫을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곰곰이 묵상하면서 상상해보았습니다. ‘빌라델비아교회가 얼마나 마음에 들었으면, 얼마나 믿음직스러웠으면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정말 빌라델비아교회가 마음에 흡족하셨나보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모습이 연상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을 활짝 열어놓고서 어서 들어오라고 맞이하는 주님의 모습, 눈물을 흘리며 뜨겁게 끌어 안아주시는 모습, 마음 깊이 만족해하시면서 그들의 노고를 격려하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여러분, 주께서 왜 빌라델비아교회를 그처럼 만족스러워 하신 걸까요?

그 비밀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주의 말씀을 지키고, 주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비록 큰 능력을 소유하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을 다하여 주께 충실했기 때문입니다. 어렵고 힘들어도 딴 맘 품지 않고 주께 신실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중심이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요즘 성경 말씀을 읽을 때마다 이 말씀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하는 것을 통절하게 느낍니다. 오리를 가고자 하는 자와 십리를 가라, 왼뺨을 치는 자에게 오른뺨도 내주어라,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어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라는 말씀을 읽을 때마다 저 자신에게 절망하게 됩니다.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지킬 수 없는 저 자신을 보면서 내가 얼마나 부족한 자인지를 발견합니다. 사실입니다. 우여곡절이 많은 인생길(험하고 구불구불한 인생길)을 걸어가면서 주님께 실망하지 않는다는 게 참 어렵습니다. 흔들림 없이 주님을 예배하는 것도 어렵고, 하나님나라를 소망하면서 현재를 살아내는 것도 어렵습니다. 그런데 빌라델비아교회는 작은 능력에도 불구하고 주변 상황을 뚫고 나갔습니다. 인내하면서 주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주님께 충실했습니다.

요한은 빌라델비아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거룩하고 진실하신 분”(v.7). 그렇습니다. 주님은 진실한 분이십니다. 신실한 분이십니다(신7:9, 호11:12). 저는 이 신실함이 주님의 인격 중에 최고의 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그분에게서 진실하지 않은 요소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주님처럼 정직하고 신실한 분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또 그분의 말씀만큼 진실한 말씀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주님 스스로도 보증하십니다. 내 모든 말은 신실하고 참되다(계21:5, 22:6). 그렇습니다. 주님의 모든 말씀과 행위는 너무도 진실하고 신실하십니다.

그렇다면 신실하신 주님께서 교회에 기대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다른 무엇보다도 신실함을 기대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신실함(충실함)이야말로 주님이 교회에 기대하는 최고의 덕목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라틴 아메리카의 신학자 르네 빠딜라는 교회가 신실해야 할 것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의 가장 큰 야망은 승리에 의한 성공일 수도 없고, 그러한 것이어서도 안 된다. 교회의 가장 큰 야망은 주님께 신실하게 되는 것뿐이다.”(복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 46쪽). 옳습니다. 주님과 교회의 관계, 주님과 그리스도인의 관계는 다른 무엇보다도 신실해야 합니다. 만일 교회와 주님의 관계, 그리스도인과 주님의 관계가 이해관계의 차원으로 떨어진다면, 이익이냐 손해냐에 따라 왔다 갔다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거래 이상도 이하도 아닌 관계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님과 교회는 절대 거래 관계일 수 없습니다. 거래 관계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과 주님의 관계는 최소한 거래 수준은 넘어서야 합니다.

주님이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기대하는 것은 거래가 아닙니다. 믿음입니다. 나를 좀 믿어달라는 것입니다. 나를 믿고 내 말을 믿어달라는 것입니다. 눈앞의 상황이 좀 아닌 것 같아 보여도 나와 내 말을 의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 때문에 손해를 보는 것 같이 생각되는 면이 있을지라도, 내가 너희에게 손해 될 일을 하지 않을 거라는 걸 제발 믿어달라는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주님과 그리스도인의 관계는 시작도 믿음이어야 하고, 마지막도 믿음이어야 합니다. 그 믿음 위에서 주님께 신실해야 합니다. 그런데 빌라델비아교회가 바로 그런 교회였습니다. 주님께 신실한 교회였습니다. 주의 말씀을 굳게 잡고 지킨 교회였습니다. 그러니 주님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얼마나 흡족했겠습니까. 주님은 진실로 그들 앞에 열린 문을 두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봅시다. 빌라델비아교회는 왜 다른 교회와 달리 신실할 수 있었을까요? 사도 요한은 그 배경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빌라델비아교회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매우 역설적이지요? 적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신실할 수 있었다, 이것은 정말 많이 생각해보아야 할 중요한 대목입니다. 반대로 뒤집어서 생각해봅시다. 만일 빌라델비아교회가 큰 능력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십중팔구는 신실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교회든 기업이든 학교든 국가든, 사람이라는 동물은 능력이 커지면 신실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능력이 커지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깨에 힘이 들어가게 되어 있고, 오만방자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다윗이 목동이었을 때 그는 하나님께 참으로 충실했습니다.

그 마음의 중심이 올곧았습니다. 그런데 왕이 되고 나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충성스러운 신하 우리야의 아내가 목욕하는 것을 보고는 그녀를 자기 침실로 불러들였습니다. 그리고 남편 되는 우리야 장군을 죽이고 아내로 삼아버렸습니다. 참으로 후안무치한 죄악을 범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사람입니다. 사람은 절대 권력을 갖게 되면 절대 부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큰 능력을 가졌는데도 불구하고 교만하지 않은 사람, 부패하지 않는 사람 거의 없습니다. 물론 예외가 없지는 않습니다. 욥(역사적인 실존 인물일 가능성은 거의 없음)이 있습니다. 욥은 부와 명예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신실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신실함이라는 것은 본래 적은 능력을 가졌을 때에 가능한 덕목입니다. 부와 권세와 영광을 거머쥔 사람이 신실하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아마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보다 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할 수만 있다면 능력이 적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유나 권세나 능력이나 명예가 조금 부족한 것이 그리스도인으로 살기에는 가장 이상적인 환경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언제 타락합니까? 환난과 고난 때문에 교회가 타락합니까? 아닙니다. 교회가 부패하게 되는 때는 언제나 부유와 권세를 차지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역사적으로도 그렇고, 성경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중세 가톨릭교회가 끝없이 부패의 나락으로 떨어진 것도 교회의 힘이 지나치게 컸기 때문이고, 사데교회가 죽은 교회가 된 것도 힘이 넘쳤기 때문이고, 라오디게아교회가 가난하고 벌거벗은 교회가 된 것도 부족한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매우 역설적이지만 이것이 사실입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놀랍게도 약한 것을 자랑하고 기뻐한 사람입니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11:30).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고후12:5). 바울이 이처럼 약한 것을 자랑하고 기뻐하게 된 것은 놀라운 체험을 하고 나서부터였습니다. 바울에게는 고질병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어떤 질병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그 질병이 바울을 몹시 괴롭혔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 질병을 치유해달라고 세 번씩이나 간절히 기도한 것을 보면, 그 질병 때문에 적잖은 고통을 당했을 것은 물론이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도 여러 가지로 장애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주님은 치유로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매우 이상한 말씀으로 응답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고후12:9).

바울은 이 말씀을 듣고서 깨달았습니다. 아하! 내가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커서 자고할까봐, 나를 넘어지지 않게 하시려고 육체의 가시를 주신 거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육체의 가시가 오히려 주의 은총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나서부터는 더 이상 약함을 부끄러워하거나 힘들어하지 않았습니다. 힘들어하기보다는 도리어 기뻐하고 자랑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12:10). 그렇습니다. 약함이 곧 강함의 근원이라는 역설을 깨달았기 때문에 바울은 약한 것들을 기뻐하고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능력의 적음이 반드시 축복이 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분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고전1:27).

그러므로 여러분, 능력이 적음을 감사하십시오. 이만큼 먹고 사는 것, 이만큼 자리를 차지하고 사는 것 감사하십시오. 사람들이 대부분 큰 능력을 원합니다만, 사실은 큰 능력이 진정한 축복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진정한 축복은 적은 능력에서 나옵니다.

빌라델비아교회는 참으로 적은 능력을 가진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적은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오히려 신실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 교회가 진실로 사랑스러웠습니다. 그래서 그들 앞에 열린 문을 놓아두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9절을 보십시오.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자칭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정당성, 그러니까 예수의 부활을 믿는 것은 허망한 짓이고 자기들의 신앙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열국의 이방인들이 자기들에게 와서 절할 것이라고 믿고 있는데 거기에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 이내 곧 그들이 네게 와서 절하게 할 것이라는 겁니다. 내가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시겠다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이런 뜻입니다. 그들이 틀렸고 너희가 옳다는 것이 입증될 것이라는 겁니다. 내 말을 굳게 잡은 것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겁니다. 연이어 10절에서는 주께서 그들을 지키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12절을 보십시오. 끝까지 인내의 말씀을 굳게 잡은 자들을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고, 그들 위에 하나님의 이름, 새 예루살렘의 이름, 나의 새 이름을 기록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게 뭘 뜻하는 것일까요? 주님께 충실한 자, 주의 말씀을 끝까지 잡은 자는 주님이 자기 이름을 걸고 지키시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붙잡는 것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 그것이 진정으로 옳은 길이라는 걸 확증하시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새 예루살렘의 이름으로, 주님의 새 이름으로 서명하여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게 하시겠다는 이야기입니다. 계시의 말씀 마지막에 가서도 확인하는 건 그겁니다. 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다. 내 말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계21:5, 22:6-7).

지금 이 시대는 신실함을 찾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인간에 대해서도 신실함이 부족하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신실함이 부족한 시대입니다. 거래는 활발한데 정직한 만남, 신실한 관계는 참으로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신실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신실함을 회복하는 길은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지금보다 가난해지고 약해지면 됩니다. 교회가 가난해지고 약해지면 교회가 무너질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오히려 주께 신실해집니다. 물론 교회가 가난해지고 약해진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교회는 가난이 축복이고, 약한 것이 은혜입니다. 교회의 희망은 부유해지고 강해지는 데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교회의 희망은 가난해지고 약해지는 데에서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