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일곱 교회에 하신 말씀(요한계시록3:21-22)

새벽지기1 2015. 12. 1. 11:21

 

오늘은 계시록 2-3장을 마무리하면서 주님이 일곱 교회에 공히 하신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한 번도 빼놓지 않고 일곱 번을 반복해서 하신 말씀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2:7,11,17,29, 3:6,13,22)입니다. 들으라는 겁니다. 들으라는 거예요. 다른 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고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는 겁니다. 여기서 주님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교회는 ‘말하는 기관’이기에 앞서 ‘들음의 기관’이라는 것입니다. 듣는 것이 말하는 것보다 중요하고, 듣는 것이 행하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듣는 것이 주님과 교회의 관계에 있어서 절대 간과되어서는 안 되는 가장 중요한 토대입니다. 절대 잊으면 안 되는 최고의 명제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이야기를 하고, 주님의 길을 가도록 부름받은 주님의 몸입니다. 교회는 절대로 자기 주체가 되어서는 안 되는 주님의 몸이기 때문에 자기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터득한 지혜를 이야기해서도 안 되고, 교회가 경험한 것을 이야기해서도 안 됩니다. 교회는 언제나 들은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성령이 들려주시는 이야기, 즉 하나님 이야기, 주님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주님 이야기를 하고, 주님이 가신 길을 가야 합니다. 교회가 자기 이야기를 하거나 자기 길을 가면 안 돼요. 물론 세상은 다들 자기 목소리를 내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이 시대는 자고로 자기 홍보 시대이고, 자기 목소리를 내야만 살 수 있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자기 목소리를 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똑같은 말씀 -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 - 을 일곱 번씩이나 반복하신 것도 교회가 듣지 않고 이야기를 하면 안 되니까 그런 겁니다. 듣지 않고 말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이 없고, 듣지 않고 행하는 것보다 더 두려운 일이 없기 때문에 들으라고, 들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만일 교회가 듣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듣는 것보다 말하는 것이 앞서고, 듣는 것보다 행하는 것이 앞서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두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는 엉뚱한 길을 가게 되어 있습니다. 가서는 안 될 길을 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나라의 길이 아니라 종교의 길을 가게 되어 있고, 십자가의 길이 아니라 영광의 길을 가게 되어 있습니다. 사실 교회가 주님의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은 주님에 대한 배신입니다. 주님의 길을 가지 않고 종교의 길을 가는 것은 주님에 대한 반역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는 좌우간 주의 말씀을 듣는데 최우선 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어떻습니까? 말씀 듣기를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설교는 넘치지만 정작 설교자들까지도 말씀 듣는 일을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듣기보다는 말하기에 바쁘고, 듣기보다는 행하기에 바쁩니다. 목회자들도 그렇고 성도들도 그렇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행함의 가치만 알았지 들음의 가치는 모르는 것 같아요. 들음에서 생명이 나오고, 들음에서 구원이 오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도무지 들으려고 하지 않는 걸 보면 들음이 지혜와 삶의 근본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아요.

생각해봅시다. 사람들이 왜 듣기를 싫어할까요? 왜 듣는 일을 소홀히 할까요?

한 마디로 말해서 진리에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진리는 성공처럼 쟁취하는 것도 아니고, 물건처럼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고, 돈처럼 저장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진리는 들음을 통해 들어가는 새로운 세계이지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라든지,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는 것이라든지, 많은 연봉을 챙기는 것과는 별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진리는 후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선은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게 중요하고 많은 연봉을 챙기는 게 중요하니까, 진리를 듣는 일은 그 다음이라고 생각하니까 듣는 일은 후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는 겁니다.

저는 이것이 이 시대 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 가장 본질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도무지 듣지를 않고 말하기에 바쁘고 행하기에 바쁜 이것이 이 시대의 재앙이고, 이 시대의 죄악이라고 생각합니다. 뛰어야 먹고 사는 게 나오지 듣는 것은 먹고 사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고방식이 인생을 수렁에 빠뜨리는 함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일곱 번씩이나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말씀하신 것도 사람이 본질적으로 듣기를 게을리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옳습니다. 저는 제 안에서 그런 어리석음과 악함을 봅니다. 듣기보다는 말하려 하고 행하려 하는, 참으로 어리석고도 악한 본성이 제 안에 들끓고 있음을 봅니다. 욕망을 이끌리는 그 어리석고 악한 본성 때문에 잠잠히 듣지 못하는 저 자신을 봅니다.

하지만 그런 유혹을 물리치고 말씀 앞에 잠잠히 있으면 제 마음과 제 존재와 제 삶이 달라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마음을 기울여 말씀을 들으면 삶의 흐름이 달라져요. 마음을 뒤흔드는 분노의 파고가 잔잔해지고, 절망의 한숨이 잦아들고, 허무의 그늘이 벗겨지고, 욕망의 가쁜 숨이 차분해지고, 걱정 근심이 작아지고, 행복의 기운이 샘처럼 솟구쳐 오르는 참으로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던 감사와 기쁨과 행복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스멀스멀 기어 나옵니다. 물론 말씀을 들었다고 해서 눈앞의 현실이 달라지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삶의 흐름이 달라지는 건 분명합니다. 어두웠던 마음이 환해지고, 무거웠던 짐이 가벼워지고, 감사와 기쁨과 행복이 회복됩니다. 얼굴 표정이 달라져요. 신기한 일이지만 이건 거짓이 아닙니다. 진심으로 말씀을 듣는 자는 누구나 경험하는 현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하는 능력입니다. 길이자 진리입니다. 사람을 바르게 교육하고, 온전케 합니다.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힘이 됩니다(딤후3:17).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를 비판하지 않습니다. 비판하지 않으면서 회개에 이르게 하고, 공격하지 않으면서 우리를 항복시킵니다. 하나님이 말씀의 칼로 우리의 썩은 부위를 잘라내고, 악한 습성을 고치고, 깊은 상처를 도려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의 칼은 본질적으로 매우 부드럽습니다. 말씀을 들으면 영혼이 전율을 하지만 이내 곧 따스하고 달콤한 안식을 얻습니다. 위로와 용기를 얻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사랑의 심장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목표하는 것도 우리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형태의 억압에서 해방하기 위함이고, 우리를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으로 이끌어가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매우 창조적이고 변혁적이지만 동시에 매우 따뜻한 것은 사랑의 심장에서 터져 나오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사람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을 먹어야 삽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인과 교회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사는 길은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아주 단순합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들으면 됩니다. 들으면 사람이 살아나고, 교회가 살아나고, 공동체가 살아나고, 온 세계가 살아납니다. 여러분, 들으십시오. 성경을 펴고 들으십시오. 주께 마음을 기울여 들으십시오. 듣는데 시간을 투자하십시오. 들으면 삽니다.

두 번째로 주님이 일곱 교회에게 공히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한 번도 빼놓지 않고 일곱 번이나 반복하면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이 칭찬을 했든 꾸짖었든 동일하게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리라”(2:7,11,17,26).

여기서 ‘이긴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지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긴다’ 그러면 대뜸 싸움에서 이기는 것,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을 생각하기 쉬운데 여기서 ‘이긴다’는 것은 전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교회를 핍박하는 원수를 짓밟아 멸망시켜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이긴다’는 것은 말씀을 굳게 붙잡고 인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난과 핍박에도 흔들리지 않고 신실함을 잃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달리 말하면 원수들을 축복하는 것, 욕망의 포로가 되지 않는 것, 가난한 자들이 친구가 되어 주는 것, 주님의 뜻을 따르다가 고난을 받는 것, 세상이 악하지만 사랑의 마음을 잃지 않는 것, 죽음 앞에서도 부활의 약속을 붙잡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이긴다’는 말의 진정한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정복하고 짓밟고 승리함으로써 이기지 않습니다. 세상보다 더 강한 힘을 갖는 방식이나 세상보다 위에 우뚝 서는 방식으로 이기지 않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이기는 방식은 이런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교회는 세상에 짓밟히는 것이 이기는 것이고, 평화를 위해 제물이 되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세상의 폭력과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곧 세상을 이기는 것이고, 세상의 폭력에 상처를 받으면서도 그 세상을 구원으로 부르는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 곧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주님도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세상을 이겼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로마 타도를 외치거나 민중 혁명을 시도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그저 묵묵히 하나님나라의 삶을 사셨습니다. 세상과 다른 길을 가셨습니다. 패배함으로써 승리하는 길을 가셨습니다. 교회도 예수님의 방식으로 세상을 이겨야 합니다. 그것만이 진정으로 세상을 이기는 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방식으로 세상을 이기는 자에게 주님은 놀라운 약속을 하셨습니다.

생명나무 열매를 주어 먹게 하겠다고,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감추었던 만나와 흰 돌을 줄 것이라고,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겠다고, 흰 옷을 입히고 생명책에서 그 이름을 결코 지우지 않겠다고,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겠다고,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게 무슨 말씀일까요? 너희의 믿음, 너희의 소망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내 말을 들은 것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너희가 믿음으로 가고 있는 이 길이 옳다는 이야기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종말론적인 승리를 하시는데, 너희가 가는 지금 이 길이 바로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승리와 함께 하는 길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이 길의 마지막은 승리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이기는 자의 미래를 보장하겠다고, 이기는 자의 생명을 지키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약속했으니 이 약속을 신뢰하고 지금 이 길, 이 믿음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리합시다.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께서 일곱 교회를 향하여 뜨겁게 외친 질박한 호소는 바로 이것입니다.

‘들으라. 그리고 이기는 자가 되라. 너희의 현재는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으며, 너희가 가고 있는 지금 이 길은 장차 나타날 영광에 참여하는 바로 그 길이다. 그러니 제발 흔들리지 마라. 다시 말하지만 내가 말하는 것만이 참이고, 내가 약속하는 것만이 참이다. 이 참을 붙들어라.’

여러분, 주님의 이 안타까운 호소를 가볍게 듣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