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구원의 중요성과 구원 이해의 문제점(로마서8:19-23)

새벽지기1 2015. 12. 1. 13:29

구원의 중요성  

창조와 구원, 이 둘은 세상의 시작과 세상의 현실을 말해주는 가장 핵심적인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도 창조와 구원이고, 성경이 증언하는 모든 이야기의 중심도 창조와 구원입니다. 창조와 구원은 삶의 모든 것, 역사의 모든 것, 하나님의 모든 것을 푸는 키워드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창조와 구원을 빼놓고서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창조의 이야기를 빼놓으면 모든 이야기의 토대 자체가 아예 없어질 테고, 구원의 이야기를 빼놓으면 어떤 이야기라도 결국은 앙꼬 없는 찐빵 신세가 되고 말텐데 창조와 구원을 빼놓고서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창조와 구원 문제는 우리의 삶과 동떨어진 거대 담론이 아닙니다. 오래 전 태초의 이야기도 아니고, 멀고 먼 종말의 이야기도 아닙니다. 오늘의 존재 의미와 일상이 잇닿아 있는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중대한 이야기이고, 태초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떨쳐내지 못한 인류 지성사의 최고의 화두였습니다.

 

물론 구원을 별 것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 자들이 없는 건 아닙니다. 구원은 유치한 종교적 놀음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폄하하는 자들도 있고, 주어진 인생을 열심히 살다 가면 그만이지 뭘 더 고민하느냐고 힐난하는 자들도 있고, 한 번 왔다 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이라며 기꺼이 운명에 순응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공자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제자가 공자에게 죽음에 대해 묻자 공자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하지요. “내가 삶을 다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 참 정직한 고백입니다. 살아가는 일조차도 알지 못해 헉헉거리는 주제에 하늘의 일, 죽음 이후의 일까지 끌어안고 시름해야 할 이유가 뭐 있겠느냐며 짐짓 인식 불가를 선언하고 관심조차 두지 않는 자들도 있습니다. 더욱이 요즘은 실용적인 사고방식이 워낙 강세이다 보니 ‘구원’과 같은 밑도 끝도 없는 문제로 고민하는 것보다는 우선 당장 먹고 사는 일부터 해결하자는 실용적인 태도가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역사의 진보를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과학과 기술이 인류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 문제에 연연하지 않는 자들조차도 구원 문제를 완전히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도 이런 고민을 합니다. 이렇게 사는 건 제대로 사는 게 아닌데, 뭔가 잘못 살고 있는데 라는 고민을 합니다. 열심히 산다고 사는데도 왠지 사는 게 허망하다는 고민을 합니다. 세상이 온통 엉망이라고, 똥파리들이 가득한 세상이라고 하소연하기도 합니다. 어디 고민만 하나요. 살다 보면 절망을 할 때도 있고, 탄식을 할 때도 있습니다. ‘이 놈의 인생, 정말 살기 힘들다’며 온 몸으로 절규할 때도 있습니다. 사람만 아닙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 말씀에서 우주 전체가 깊이 탄식하고 있다고 말합니다(롬8:19-23).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명이 구원을 갈망하며 탄식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이 부르짖는 탄식 소리는 구원이 필요하다는 거친 몸부림이며 구원을 향한 목마름의 표출입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삶의 현실입니다. 사실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삶은 심하게 찢기고 구겨져 있습니다. 있어야 할 것과 없어야 할 것들이 마구 뒤엉켜 있습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금하신 열매를 먹고 난 다음에 그들이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하나님이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듣고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창3:8). 여기서 사람들은 아담이 하나님의 얼굴을 피한 걸 별 것 아닌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는 거야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 그게 뭐 대단한 일이겠느냐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숨었다는 것은 삶의 흐름이 달라졌다는 것을 암시하는 상징적인 행위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응시하는 생명지향적인 삶을 살았다면 이제는 하나님을 외면하는 반생명적인 방향으로 삶의 태도가 바뀌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 행동을 보면 반생명적인 태도가 좀 더 적나라하게 나타나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물었습니다. 왜 먹지 말라고 금한 열매를 먹었느냐고. 그러자 아담이 대뜸 뭐라고 대답합니까? 하나님이 내게 주신 여자가 주어서 먹었다는 겁니다. 여자는 뭐라고 대답합니까? 뱀이 꾀어서 먹었다는 겁니다(창3:12-13). 아담은 하나님과 하와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있고, 하와는 뱀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있습니다. 그 가정에서 태어난 가인과 아벨 사이에서는 한 술 더 뜨는 비극이 벌어졌습니다. 형이 동생을 시기하여 쳐 죽이는 무서운 살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창4:8). 이처럼 최초의 사람들, 최초의 가정이 벌써 반생명적으로 변했습니다. 그 후로 지금까지 삶의 흐름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생명이 생명을 공격하고 짓밟고 죽이는 일들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모든 생명이 모든 생명에게 상처받고 신음하는 일들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살인 사건 이후의 정황을 살펴봅시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 물론 가인은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냐며 짐짓 모르는 체 발을 뺍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창4:10). 그렇습니다. 죽은 자는 피로 소리칩니다. 원수를 갚아달라고 외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해 달라고 외칩니다. 반생명적인 이 세상을 구원해 달라고 소리칩니다. 여러분, 조용히 세상에 귀 기울여 보십시오. 세상에는 핏소리가 가득합니다. 모든 생명이 모든 생명을 죽이는 이 저주받은 세상에서 어찌할 줄 모르고 두려워 떠는 생명의 탄식소리가 가득합니다. 구원을 갈구하는 신음소리가 가득합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모든 피조물들의 탄식이자 갈망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부정할 수 없는 눈앞의 진실입니다. 그런데도 이 진실을 외면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구원을 열망하는 뜨거운 외침을 별 것 아니라고, 그것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벌이는 유치한 소동에 불과하다고 폄하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 자체가 벌써 반생명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원이 요청되는 현실을 무시하고 외면하는 것보다 더 잔인하고 반생명적인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영국의 신약학자 톰 라이트는 구원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창조계가 필요로 하는 것은 유기, 혹은 진화가 아니라 구속과 회복이며, 그 두 가지는 예수님의 부활에 의해 약속되고 보장되었다. 이것이 바로 온 세상이 기다리는 것이다.”(마침내 드러난 하나님나라. 181쪽). 그는 또 말하기를 “부활의 생명과 권능이 이 세상을 휩쓸고 지나가면서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하나님의 영광이 그 세상을 가득 채울 순간을 온 세상이 학수고대하며 기다리고 있다.”고 했습니다(182쪽). 옳습니다. 모든 생명은 구속과 회복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삶은 진정한 삶이 아니기 때문에, 온갖 악에 찢기고 짓눌린 상처투성이인 삶이기 때문에, 모든 생명이 제 호흡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생명은 구원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구원 문제는 기독교의 핵심 내용일 뿐만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의 최대 화두입니다.

 

구원 이해의 문제점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날 기독교는 기독교의 핵심 내용이자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의 탄원인 이 구원 문제에 대해 그리 진지하지 않습니다. 구원에 대한 이해가 매우 혼란스러울 뿐만 아니라 구원에 대해 심드렁한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 구원 문제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크게 3부류가 있습니다. 첫째, 구원은 예수 믿을 때 이미 받았기 때문에 그 문제 가지고 더 이상 고민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부류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구원 문제를 초신자의 문제라고만 여기고, 자기들은 구원 문제를 이미 졸업했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내가 구원을 받았나 못 받았나 하는 것 가지고 평생 왔다 갔다 하는 부류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어느 때는 구원받은 것 같기도 하고, 어느 때는 구원 못 받은 것 같기도 하다고 헷갈려 하면서 평생 구원 문제에 집착합니다. 셋째, 구원을 상대화시키는 부류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구원을 받으면 좋지만 안 받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구원받기 위해 예수 믿는 것을 매우 유치한 신앙이라고 치부합니다(물론 구원이 신앙생활의 목표일 수는 없습니다. 구원이 목표가 되면 신앙은 물론이고 예수님까지도 구원의 방편으로 전락해버릴 위험이 있기 때문에 구원받기 위해 예수를 믿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 문제는 기독교의 핵심 내용이고, 모든 생명의 화두임에 틀림없습니다). 보통 지식인이나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분들 중에 이런 생각을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구원 문제에 대해 혼란을 부채질하는 요소들이 곳곳에 많습니다. 최근에 케임브리지 대학의 물리학교수인 스티븐 호킹이 매우 냉소적인 비판을 했습니다. “천국이나 사후 세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믿음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들이 꾸며낸 동화에 불과하다.”고 말이지요. 그는 “죽기 전 마지막으로 뇌가 깜빡거리는 순간 이후에는 어떤 것도 없다.”고 죽음 이후를 전면적으로 부정했습니다. 또 미국 성공회의 존 쉘비 스퐁 주교는 최근 [영생에 대한 새로운 전망]이라는 저서를 통해 ‘천국’이나 ‘지옥’ 같은 개념은 기독교에서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과거에는 천국과 지옥이라는 상벌 논리로 사람들을 설득했지만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누구는 천국으로 보내고 누구는 지옥으로 보내는 하나님을 거부한다’고 말하면서 천국과 지옥의 논리로는 더 이상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다고 비판했습니다. 이 외에도 여기저기서 수많은 소리들이 들립니다.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했다느니, 동성애자라느니, 민중혁명의 실패자라느니 별별 희한한 이야기들이 다 들립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과 구원에 대해 혼란스러워하는 건 어쩌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참 연약한 존재이지 않습니까? 사람은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가 몸담고 있는 시대와 사회의 영향을 받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더욱이 현대 사회는 전 세계가 한 울타리가 되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이야기와 주장들이 인터넷이라는 정보의 바다에서 출렁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들으려 하지 않아도 수많은 주장들을 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다양한 정보들을 접하다보면 신앙이 혼란에 빠지기 쉽습니다. 사실 오늘날처럼 기독교가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던 적은 없었습니다. 신학자 크라우스는 오늘날 기독교의 현실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교란 명칭에서 떠올리는 내용은 그리스도에 대한 다양한 이해와 오해, 해명과 은폐, 찬사와 악평들이 한데 뭉뚱그려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내용이 너무 다양해서 어지러울 정도다.”(조직신학. 13). 그렇습니다. 정말 어지러울 정도로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현실입니다. 구원에 대한 이해도 예외가 아닙니다. 구원을 바라보는 관점이 사람마다 교회마다 백인백색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구원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구원은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구원 하면 대뜸 생각하는 게 이겁니다. 영혼이 천국 가는 것, 죽음과 함께 몸은 썩어 없어지고 영혼은 하나님 품에 안기는 것을 생각합니다. 사실 성경은 한 번도 이런 구원을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을 그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돌보심과 축복을 받다가 죽고 나서는 영혼이 천국 가는 것을 가장 이상적인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것이 구원에 대한 첫 번째 오해이면서 가장 보편적인 오해입니다.

둘째, 구원은 죽음 이후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죽기 전에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해도, 그것은 천국에 갈 수 있는 보증 수표를 받은 것에 불과하고, 진짜 구원은 죽고 나서 받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죽기 전에는 온갖 좋은 것들로 넘치게 축복받으면 되고, 구원은 죽은 다음에 받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셋째, 구원은 인간만 받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온 세상은 다 불타 없어지고 예수를 믿는 사람만 구원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전인이 구원받는 게 아니라 영혼만 구원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심각한 왜곡입니다. 이런 구원은 하나님이 약속한 적이 없는 참으로 괴이한 구원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죽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성취한 구원은 우주적인 구원이지 영혼의 구원이 아닙니다. 사실 구원은 절대적으로 창조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창조의 토대가 없이는 구원이 설 수 없습니다. 좀 더 근원적으로 따져 말하면, 구원은 창조 세계 전체의 존재 의미와 운명이 달린 문제입니다. 삶의 본분이 어떠해야 하느냐 하는 것과 깊이 연루되어 있는 문제입니다. 오늘 내 존재의 의미와 너의 존재의 의미가 걸려 있는 것이 구원이고, 오늘 내 삶이 어디를 향하여야 하며 어떠해야 하는지와 관련된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서 회자되고 있는 구원 이야기는 이런 내용들이 없습니다. 보편적으로 유통되고 있는 구원 이야기를 살펴보면, 거기에는 슬프게도 지극히 이기적인 인간의 욕망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존재의 이익과 번영에 골몰하는 것도 그렇고, 죽음의 한계를 뛰어넘어 영원히 살고자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신앙생활과 구원에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이 깊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온 세상이 다 멸망한다 해도 나만 구원받으면 된다고 하는 부패한 의지가 신앙생활과 구원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원이 아주 이상한 구원으로 찌그러져버렸습니다. 구원의 지평이 너무 편협해져버렸습니다. 본래 구원은 용서하는 사랑과 단절되었던 생명의 그물망이 다시금 이어지는 참으로 위대하고 아름답고 풍성하고 깊고 오묘하고 다채롭고 광대한 것이었는데, 지금 교회 안에서 유통되고 있는 구원에는 그런 위대함과 아름다움과 풍성함과 심오함과 오묘함과 다채로움과 광대함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구원은 죽음 이후의 문제로 물러나버렸고, 개인의 문제로 쪼그라들어버렸고, 영혼의 문제로 탈바꿈해버렸습니다. 우주와 역사 전체를 포괄하는 거대한 구원이 쥐방울만해져버렸습니다. 사실입니다. 지금 교회 안에는 하나님의 구원이 아닌 엉뚱한 구원이 하나님의 구원인양 오도되고 있습니다. 하여, 지금부터 그 실상이 어떠한지를 하나하나 살펴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