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요한이 본 하늘 이야기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이 말하는 하늘 이야기는 사실 객관적인 하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요한이 진정으로 말하려고 하는 것은 하늘 이야기가 아니라 땅 이야기입니다. 요한이 하늘로 불려 올라간 것도 하늘을 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땅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땅에서는 땅을 제대로 볼 수 없고, 하늘을 통해 땅을 보아야 땅을 제대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땅을 제대로 보게 하려고 하늘로 불려 올라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도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하늘 이야기를 통해 땅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
요한이 본 하늘에는 24장로들뿐 아니라 괴이하게 생긴 네 생물이 있었습니다. 그 모양이 하나는 사자 같고, 하나는 소 같고, 하나는 사람의 얼굴 같고, 하나는 독수리 같은데, 몸에는 제각각 날개가 여섯이나 달려 있고, 날개마다 눈들이 가득했습니다. 그 생물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하늘에 저런 생물이 있다는 게 좀 의아스럽지 않습니까? 24장로들이 있는 것까지는 좀 이해를 하겠는데 괴이하게 생긴 생물들이 있다는 것은 왠지 낯설지 않습니까? 우리는 보통 ‘하늘’ 그러면 하나님과 천사들만 있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요한이 본 하늘에는 낯선 생물들이 있었습니다.
우선 네 생물이 뭘 가리키는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서 네 생물은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을 의미합니다. 동서남북, 이 넷을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동서남북’은 어느 때 사용합니까? 사방 전체를 아우를 때, 어디 한군데도 빼놓을 수 없을 때 ‘동서남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네 생물은 동서남북에 흩어져 있는 모든 생명체, 나아가 피조물 전체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전하는 메시지는 이렇게 됩니다. 동서남북에 흩어져 있는 모든 생명체들이 하늘나라에 참여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다시 말하면 24장로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들도 구원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 놀랍지 않습니까? 우주 전체가 구원을 받는다는 게 낯설지 않습니까? 우리는 보통 어떻게 생각합니까?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는 구원이란 대충 이런 것입니다. 예수 잘 믿으면 살아서는 하나님의 돌보심과 축복을 받고 죽어서는 영혼이 천국에 간다, 이것이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이 소박하게 믿고 있는 구원의 내용입니다. 여기에 하나라도 더하거나 뺄 것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살아서도 복을 받고 죽어서도 복을 받는데, 살아서 받는 복은 부귀와 영화이고, 죽어서 받는 복은 육체를 빠져 나온 영혼이 영원히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영혼이 받는 것이 구원이고, 죽은 이후에 받는 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우주 만물은 구원에서 제외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지금까지 신앙생활하면서 개나 고양이가 구원받는다는 생각을 해보셨습니까? 지렁이, 달팽이, 이리, 뱀, 호랑이가 구원받는다는 생각을 해보셨습니까? 소나무, 민들레, 장미가 구원받는다는 생각을 해보셨습니까? 해, 달, 별이 구원받는다는 생각을 해보셨습니까? 아마 거의 안 해 보셨을 겁니다. 구원은 인간이나 받는 것이지 개나 고양이가 무슨 구원을 받겠느냐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구원은 철저하게 인간의 죄 문제와 관련된 것이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도 인간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죽으신 것이니까 인간 외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예수님이 개나 고양이를 위해 죽은 것도 아니고, 소나무나 민들레를 위해 죽은 것도 아니니까 당연히 그런 것들은 예수님의 구원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동서남북에 흩어져 있는 모든 생명체들이 다 구원을 받습니다.
여러분, 잘 믿어지지 않습니까? 이상하게 들리십니까? 성경을 살펴봅시다. 구원의 큰 상징으로 손꼽히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봅시다. 노아가 만든 방주에 누가 들어갔는지를 봅시다. 누가 구원의 방주에 들어갔습니까? 노아 가족만 들어갔습니까? 아닙니다. 각종 동물들이 다 들어갔습니다.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 또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 땅에 기는 모든 것이 노아 가족과 함께 방주로 들어갔습니다(창7:2-9). 한 종도 빼지 않고 모든 종이 다 들어갔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생명체들이 구원의 방주에 들어갔습니다.
바울도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구원의 위대성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1:19-20). 여기서 바울은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이 하늘에 있는 것들뿐 아니라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도 포함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유명한 부활 이야기(고전15장)에서도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라고 하면서 구원의 목표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고전15:28).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그리고 만물의 주인으로서 만물 안에 계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의 통치가 현실화되는 때의 세계상이 어떠할지를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게 묘사했습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11:6-9). 물론 이 표현은 은유입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한 세상은 영혼과 천사들만의 세상이 아니라 만물이 다함께 평화를 누리는 세상이라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더욱이 하늘에서 4생물들과 24장로들이 하나님을 찬양할 때 찬양의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는 것이 뭔가를 보십시오. 바로 창조입니다(v.11). 하나님이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한 이유는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창조는 하늘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찬양의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창조주로서 영광과 찬양을 받으십니다.
이처럼 요한이 네 생물을 통해 말하려고 하는 메시지는 매우 분명합니다. 모든 생명체들이 구원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구원은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으로부터 구제받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은 세상 전체가 구원의 대상입니다. 세상 전체가 구원에 참여합니다. 좀 더 근본적으로 말하면 정치 질서와 경제 질서를 비롯해서 사회 시스템 전체가 구원에 참여합니다. 우주에 있는 모든 생명들이 구원에 참여합니다. 우주적인 구원론입니다. 그렇습니다. 온 세상은 심판의 대상이 아닙니다. 저주의 대상이 아닙니다. 하늘만 남고 땅은 다 불타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하늘과 땅은 남자와 여자처럼 서로를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남자 없이 여자 없고, 여자 없이 남자 없듯 하늘과 땅도 그렇습니다. 하늘 없이 땅 없고, 땅 없이 하늘 없습니다. 하늘도 구원을 받고, 땅도 구원을 받습니다. 바로 이것이 요한이 네 생물을 통해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이제는 네 생물의 모양을 보겠습니다. 네 생물은 그 모양이 아주 독특합니다.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넷째 생물은 독수리 같습니다. 네 생물 모두 6개의 날개를 가졌고, 날개에는 수많은 눈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건 또 뭘까요? 왜 이렇게 괴기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구약으로 넘어가 봅시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여호와의 보좌를 보았을 때에도 비슷한 생물의 모습이 나옵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그발 강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때에 에스겔은 여호와의 보좌와 함께 네 얼굴 모양을 가진 생물을 보았습니다(겔1:4-14). 요한이 본 생물의 얼굴과 같습니다. 이사야는 선지자로 부름을 받을 때에 여호와의 보좌를 보았는데, 그때에 이사야가 본 스랍들이 여섯 날개가 있고 눈들이 가득했습니다(사6:2). 여기서 이사야가 말한 스랍은 하나님의 일을 수종드는 영적인 존재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이 본 것과 이사야가 본 것이 요한에게서 합성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에스겔이 본 네 얼굴을 가진 생물에다가 이사야가 본 여섯 날개와 날개마다 눈들이 가득한 스랍들의 이미지가 덧입혀졌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네 생물에다가 하나님의 일을 수종드는 스랍들의 이미지를 덧입혔을까요? 네 생물이 하나님의 일을 수종들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네 생물로 상징되는 삼라만상이 과연 하나님의 일을 수종들까요? 그렇습니다. 우주 만물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신비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일을 수종들고 있습니다. 어떻게 수종드는지를 한 번 봅시다. 네 생물은 그 모양이 아주 독특합니다.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넷째 생물은 독수리 같습니다. 이것은 상징입니다. 사자는 영광을 상징하고, 황소는 힘을 상징하고, 사람은 지혜를 상징하고, 독수리는 고고함(빼어남)을 상징합니다.
이 상징이 말하는 것은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이 피조세계를 다스리실 때에 영광으로 가득한 능력과 빼어난 지혜로 다스리신다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고, 두 번째로 모든 만물 속에는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과 지혜와 고고함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같은 이야기인데 다른 뉘앙스를 갖고 있기 때문에 둘로 이야기했습니다.
좀 쉽게 이야기해봅시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죄악을 심판하시는 것은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불의를 행한 것이라고 핑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핑계할 수 없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다”(롬1:20).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빛나는 지혜가 모든 피조물 가운데 깃들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누구든지 깊이 들여다보면 만물 가운데에서 창조자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볼 수가 있다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몰라서 불의를 행했다’고 핑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한이 사자, 송아지, 사람, 독수리 모양을 통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동서남북에 있는 모든 생명체들 속에는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과 지혜와 영원하심이 깃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조직신학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말할 때 보통 특별계시와 자연계시로 분류해서 말합니다. 성경은 특별계시, 삼라만상은 자연계시라고 말합니다. 아주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삼라만상을 단지 물질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삼라만상은 단지 물질이 아닙니다. 삼라만상은 계시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보여주는 계시입니다. 물론 직접적인 계시는 아닙니다. 하지만 삼라만상은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아름다움,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드러냅니다.
공기, 물, 바람, 꽃, 벌, 지렁이를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것들이 모든 생명을 살리고 있습니다. 지렁이는 땅을 살리고, 바람과 벌은 꽃들을 수정시켜서 식물을 살리고, 공기는 숨 쉬는 모든 생물을 살리고, 물은 만물을 살립니다. 여러분, 이런 일을 어떻게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다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요즘 자연 치유가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깊은 숲에 들어가서 자연을 호흡하며 살았더니 정신적으로 건강해지더라, 불치병이 치유되더라 하는 이야기들을 많이 합니다. 틀린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연 속에는 하나님의 생기와 사랑과 영광이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연 속에 들어가면 절로 마음이 가벼워지고, 행복해지고, 모든 긴장이 누그러지고, 몸과 정신이 살아나는 게 당연합니다. 자연 속에 들어가면 몸이 먼저 압니다. 세포들이 좋아한다는 걸 몸이 먼저 알고 느낍니다. 치유가 안 일어날 수 없습니다. 정신과 육체뿐 아닙니다. 영적으로도 치유가 일어납니다. 숲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영성이 살아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만물 가운데에서 만물을 통해 일하십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신비한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삼라만상은 우리 맘껏 이용하라고 주어진 단순한 도구가 아닙니다. 단순한 물질이 아닙니다. 삼라만상은 삼라만상을 먹이고 살리는 하나님의 손길이며,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는 삶의 동반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신성을 비추는 말없는 거울입니다. 만물을 살리기 위해 섬세하게 디자인된 축복의 통로입니다. 진실로 자연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최고의 축복입니다. 이보다 더한 축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복된 선물이 지금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인간의 탐욕에 짓밟힌 나머지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신음하고 있습니다. 물질만도 아니고 도구만도 아닌 자연이 물질과 도구로 전락한 채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멈추어야 합니다. 자연을 도구화하는 폭력 행위를 멈추어야 합니다. 멈출 뿐 아니라 그동안의 폭력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용서를 구하고, 자연을 새롭게 대해야 합니다. 아끼고 사랑해야 합니다. 고개 숙여 감사해야 합니다. 여러분, 날마다 자연 앞에서 겸허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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