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로 불리어 올라간 요한은 보좌를 보았고, 24장로들과 네 생물들이 보좌에 계신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연이어 또 하나의 장면을 보게 됩니다. 보좌에 앉으신 분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두루마리에는 안팎으로 글이 쓰여 있었고, 일곱 개의 인으로 단단히 봉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힘 있는 천사가 큰 소리로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누가 저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v.2). 그 소리는 하늘 전체에 울려 퍼졌습니다. 하지만 내가 뗄 수 있다며 나오는 자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24장로나 네 생물도 미동을 하지 않았고, 그 많은 천사들도 꼼짝을 하지 않았습니다. 정적 그 자체였습니다.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 그 어디에도 능히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었습니다.
두루마리의 인을 뗄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요한은 크게 울었습니다.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요한이 왜 울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울었다는 것은 그 두루마리의 인이 반드시 떼어져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인을 떼지 못하는 것은 울어야 마땅한 일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왕의 밀지를 생각하면 인을 떼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텔레비전의 역사극을 보면 왕실의 운명이 일촉즉발의 위기에 빠져 있을 때 왕이 문제를 해결할 만한 사람에게 밀지를 보내지요. 왕의 도장으로 봉인한 편지를 심복에게 건네면서 이 서찰을 어디에 있는 누구에게 은밀히 전하라고 명합니다. 다른 사람이 보면 절대로 안 되니 반드시 그 사람에게만 서찰을 전해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하면서 밀지를 보냅니다. 그런데 만일 그 밀지가 당사자에게 전달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사자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전달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왕실은 위기를 해결하지 못하고 큰 화를 입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왕의 밀지는 반드시 당사자에 의해서 봉인이 떼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보좌의 앉으신 분의 두루마리도 그렇습니다. 누군가에 의해서 그 인이 떼어져야만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두루마리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도대체 두루마리가 무엇이기에 그 인을 뗄 자가 없는 것 때문에 울기까지 한 것이냐 하는 겁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성경 66권을 말한다는 견해도 있고, 요한계시록을 말한다는 견해도 있고, 미래 역사의 비밀이라는 견해도 있고, 하나님의 뜻(말씀)을 말한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사실 딱부러지게 ‘이것이다’라고 말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단지 저는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시고, 역사를 말씀으로 다스리신다는 관점을 중시하면서 두루마리가 미래 역사의 비밀이 담겨있는 신비의 문서라기보다는 미래 역사 자체를 의미하는 게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두루마리의 인을 뗀다는 것은 다른 뜻이 아니라 역사의 장을 연다, 역사가 막혀 있지 않고 진행된다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누가 저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는 물음도 ‘누가 역사를 진행시킬 수 있느냐?’, ‘누가 역사의 주인이 될 수 있느냐?’라는 물음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요한이 본 장면이 좀 더 선명하게 이해됩니다. 역사 자체인 두루마리는 하나님의 오른 손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역사는 굳게 봉인되어 있습니다. 일곱 개의 인으로 철저하게 봉인되어 있습니다. 때가 될 때까지, 적임자가 나타나 봉인을 뗄 수 있을 때까지 두루마리는 그렇게 봉인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영원히 봉인되어 있으면 안 됩니다. 누군가는 그 봉인을 떼고 두루마리에 있는 역사를 진행시켜야 합니다. 어둠 속에 닫혀 있는 역사가 새롭게 열려야 합니다. 그런데 역사를 진행시킬만한 적임자, 그 역사를 승리로 이끌어 갈만한 적임자가 없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어떻게 요한이 울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두루마리의 인을 뗄만한 자가 하나도 없는 현실 앞에서 어떻게 울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큰 소리로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에 장로 중의 한 사람이 요한에게 말했습니다. 울지 말아라. 눈물을 닦아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다. 그가 이겼으니 두루마리의 인을 떼시리라고 말해주었습니다(v.5). 그는 유대 지파의 사자이고, 다윗의 뿌리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정말 기적 같은 소리였습니다. 너무도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짙은 어둠 속에 한 줄기 강렬한 빛이 쏟아지는 것 같은 해방의 소리였습니다. 그 소리를 듣자 요한은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게 누구인지 궁금했습니다.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눈물을 닦고 앞을 주시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요한의 눈에 보인 것은 놀랍게도 어린 양이었습니다.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기는 했지만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은 그 어린 양이 이긴 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연약한 어린 양이 보좌로 나아가더니 보좌에 앉으신 분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도 취하지 못했던 그 두루마리를 어린양이 취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난센스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어린 양이 어떻게 승리자일 수 있겠습니까? 어린 양이 어떻게 유대 지파의 사자일 수 있고, 다윗의 뿌리일 수 있겠습니까? 어린 양은 약한 것 중의 약한 것이고, 먹잇감 중의 먹잇감입니다. 어린 양이 사자처럼 승리한다는 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더욱이 어린 양은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았습니다.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 양, 이 어린 양은 결코 사자일 수도 없고, 다윗의 뿌리일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늘에서는 찬송이 그치지 않습니다. 어린 양은 두루마리를 갖기에 합당하다고,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다고,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야말로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고 엎드려 경배합니다. 하늘에 있는 24장로들과 네 생물뿐 아니라 모든 천사들까지 한 목소리로 어린양을 찬양합니다.
이 어린 양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예수님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유월절 어린 양,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 예수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린 양이신 예수님은 이겼습니다. 이미 승리하셨습니다. 이미 승리하셨기 때문에 두루마리의 인을 떼시기에 합당하셨습니다. 사실입니다. 그분은 능히 역사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어린 양이 두루마리를 취했다는 것은 예수님이 역사의 주인이 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두루마리의 인을 떼기에 합당하신 유일무이한 분이십니다. 다윗의 권세를 이어받은 진정한 왕이십니다. 어린 양이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졌다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세상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최상의 승리를 하신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이 대목에서 우리는 중대한 질문 하나를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승리하셨습니까? 예수님이 승리하셨다는 사실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어떤 방식으로 승리하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어떤 방식으로 승리와 영광을 얻으셨습니까? 군사적인 힘을 통해서였습니까? 정치적인 권세를 통해서였습니까? 군중의 지지를 등에 업고서였습니까? 계략으로 상대방을 함정에 빠뜨려서였습니까? 백성들을 배불리 먹여서였습니까? 종교적인 초월을 통해서였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음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죽는 지극한 약함과 희생을 통해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강함으로 세상을 찍어 누른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품어 안음으로써 세상을 이겼습니다. 세상을 용서함으로써 세상을 이겼습니다. 세상에게 짓밟힘을 당함으로써 세상을 이겼습니다.
물론 외형적으로 보면 세상이 예수님을 짓밟았습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패퇴시켰습니다. 예수님은 로마의 권세에 붙잡혀 굴복한 패배자이셨지 승리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떻습니까? 실제로는 예수님이 승리자이셨습니다. 외형적으로 보면 로마의 권세가 승리한 것이 분명하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이 승리한 것이 분명합니다. 외형적으로 보면 세상이 예수님을 짓밟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이 세상 권세를 짓밟았습니다.
지금도 그 양태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세상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과연 승리자이십니까? NO.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승리자가 아닙니다. 이천년 전 그때처럼 오늘도 예수님은 패배자로 보입니다. 세상 앞에서 예수님은 기도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날로 강해지고 있습니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이 얼마나 빠른지 따라가는 것 자체가 버거울 정도입니다. 과학과 기술이 세상을 완전히 탈바꿈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네 삶을 과거보다 더 화려하게 만들고 있고, 더 다양하고 풍성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돈만 있으면 이 세상은 천국이나 다름없을 만큼 모든 것이 완비된 멋진 세상입니다. 물론 예수님 보란 듯이 죄악도 더 깊어졌습니다. 어둠은 더 교묘해졌고, 불의는 더 판이 커졌습니다. 죽음도 변함없이 왕노릇하고 있습니다. 로마가 멸망했다고는 하지만 로마가 행사했던 패권을 미국이 이어받고 있습니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권세가 세계의 정치와 군사와 경제를 주무르고 있습니다. 예수의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은 교회조차도 세상의 종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도 많고 세계만방에 교회가 많이 퍼져있기는 합니다만, 그 속을 깊이 들여다보면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세상을 이겼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거의 언제나 세상과의 싸움에서 패배했습니다. 교회가 세상에 선한 영향을 미치기보다는 세상이 교회에 악한 영향을 미치기 일쑤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어디를 보아도 예수님이 승리했다는 흔적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이천년 전에 세상 앞에서 힘을 쓰지 못했던 예수님은 지금도 여전히 세상 앞에서 힘을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주를 정복하고 있는 광대한 세상 앞에서 예수님의 존재는 발밑에 때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우리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진실의 전부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눈에 보이는 것이 진실의 전부가 아님을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패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패배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승리하신 자로서 지금도 승리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여전히 패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예수님의 통치가 말뿐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예수님은 지금도 역사의 두루마리를 갖고 계신 분으로서 당당하게 역사를 이끌어가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역사의 후방으로 밀려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역사의 최전방에서 역사의 주인으로, 역사의 승리자로 당당하게 서 계십니다. 물론 예수님은 아직도 어린 양의 양태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그때처럼 역사 앞에서 약함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게 짓밟히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강자로 나타난 적이 없습니다. 교회가 강자로 나타난 적은 있지만 예수님은 강자의 모습으로 나타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그때처럼 어린 양으로서 무력하기가 짝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끼리는 예수가 승리자라고 큰소리하지만 교회 밖에 나가서는 그런 소리 못합니다. 교회 밖에서 그런 소리했다가는 코웃음 삽니다. 그런 소리 자주 하고 다니다가는 사람들에게 왕따 당합니다. 그리스도인들조차도 교회 안에서는 믿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지만 교회 밖으로 나가면 흔들립니다. 예수가 역사의 주인이시고 유일한 승리자라는 사실을 굳게 붙잡지 못합니다. 머리로는 믿는 것 같은데 실제로는 믿음이 흔들립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믿으면서도 실제로는 힘 있어 보이는 세상을 따라 가는 것도 다 그래서입니다.
그런데 하늘은 진실을 말합니다. 어린 양이신 예수님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합니다. 오직 그분만이 승리자이시고, 오직 그분만이 두루마리의 인을 떼기에 합당하다고 말합니다. 24장로는 말할 것도 없고, 네 생물과 하늘의 천사들까지도 한 목소리로 그 진실을 노래합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죽임당한 어린 양이 역사의 승리자라는 것은 하늘이 인정하는 진실입니다. 요한은 말합니다.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진실에 매이지 말라고. 하늘이 인정하는 진실에 눈을 뜨라고. 하늘이 인정하는 진실을 굳게 붙잡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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