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생은 유구한 역사 앞에서 너무 짧습니다. 백 이십년을 산다 한들 역사의 한 순간에 불과합니다. 인생은 정말 역사 앞에서 하루살이에 불과합니다. 하루살이에 불과한 인생이 역사의 신비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루살이가 사계절을 알 수 없는 것처럼 인생은 역사를 알 수 없습니다. 하루살에 불과한 사람이 유구한 역사의 내막을 안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기본적으로 역사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비록 역사의 한 순간밖에 살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역사를 호흡하며 살아야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 역사의 방향, 역사의 성격, 역사의 종국을 알아야 인생을 제대로 살 수 있는 역사적 존재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역사의 신비를 알 수가 없습니다. 마땅히 알아야 하지만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이 간극을 어떻게 해결해야겠습니까?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역사의 내막을 보여주시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여, 하나님께서는 요한을 불러서 역사 전체를 통시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이 역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역사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알고 역사를 호흡하며 살아가라고 역사의 내막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하나님이 오른 손에 갖고 있던 두루마리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요한계시록은 거대한 역사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 안에서 바라본 역사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 너머에서 바라본 역사 이야기, 하늘에서 역사 전체를 통시적으로 바라본 역사 이야기,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역사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역사 이야기는 일곱 개의 봉인으로 굳게 봉해져 있었는데 어린 양이신 예수님에 의해서 그 봉인이 떼어졌습니다.
오늘은 일곱 개 중에서 네 개의 봉인만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첫 번째 봉인을 떼자 흰 말과 말을 탄 기사가 나타났습니다. 두 번째 봉인을 떼자 붉은 말과 말을 탄 기사가 나타났습니다. 세 번째 봉인을 떼자 검은 말과 말을 탄 기사가 나타났습니다. 네 번째 봉인을 떼자 청황색 말과 말을 탄 기사가 나타났습니다. 여기서 말은 역사의 기본 성격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하나의 상징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말은 항상 전쟁과 싸움에 등장했습니다. 말은 전쟁을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두루마리의 인을 뗄 때마다 말이 등장했다는 것은 인류 역사의 기본 성격이 전쟁, 싸움이라는 것을 말해준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절대 부정할 수 없는 냉엄한 진실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한 마디로 말해서 전쟁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다 평화를 소원하고 꿈꿉니다만 현실은 언제나 싸움과 전쟁의 연속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물어보십시오. 싸우며 살고 싶다는 사람이 있는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지만 다들 원치 않는 싸움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인생살이라는 게 냉정하게 따지면 하루하루가 싸움의 연속입니다. 나 자신과 싸우고, 부부간에 싸우고, 부모 자식 간에 싸우고, 정당 간에 싸우고, 경영자와 노동자 간에 싸우고, 상사와 부하 간에 싸우고, 기업 간에 싸우고, 학교 간에 싸우고, 국가 간에 싸우고, 인종 간에 싸우는 게 인생살이입니다. 삶이란 온갖 형태의 싸움판입니다. 우리가 ‘경쟁’이라는 말로 미화하기도 합니다마는 ‘경쟁’이 됐건, ‘투쟁’이 됐건, ‘전쟁’이 됐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근본적으로는 다 ‘다툼’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싸움하며 사는 게 싫어서 전원으로 돌아가는 자들도 있습니다. 1700년 전에 중국의 도연명이라는 사람이 작은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귀거래사’라는 글을 지었습니다. 그 앞부분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돌아가자. 고향 전원이 황폐해지려 하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
지금까지는 고귀한 정신을 육신의 노예로 만들어 버렸다.
어찌 슬퍼하여 서러워만 할 것인가.
이미 지난 일은 탓해야 소용없음을 깨달았다.
앞으로 바른 길을 쫓는 것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인생길을 잘못 들어 헤맨 것은 사실이나, 아직은 그리 멀지 않았다.
이제는 깨달아 바른 길을 찾았고, 지난날의 벼슬살이가 그릇된 것이었음을 알았다.”
도연명뿐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싸움 없는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싸움 없이 산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모든 인간이 죄인이고, 또 어둠의 권세가 반역을 일삼고 있기 때문에 평화로운 삶을 산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평화로운 삶을 꿈꾼다 해도 역사 자체가 싸움판인데 어떻게 싸움 없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역사 속에 휘몰아치는 전쟁의 기운을 어떻게 피할 수 있겠습니까? 매우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긴 합니다만, 투쟁과 싸움은 피할 수 없는 역사의 현실입니다.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한다 하더라도, UN이 아무리 국제 평화를 위해 노력한다 하더라도 싸움과 전쟁은 절대로 종식되지 않습니다. 제가 너무 절망적인 이야기를 하는 건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역사는 종말의 그날까지 싸움과 전쟁의 와중에서 진행될 수밖에 없습니다. 슬프지만 이것이 두루마리가 전하는 역사의 진실입니다.
하나님은 말을 통해서 역사의 기본 성격이 싸움과 전쟁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이제는 말의 종류를 살펴보겠습니다. 말의 종류는 역사의 구성 요소가 무엇인지를 말해줍니다. 두 번째 말부터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두 번째 말은 붉은 말입니다. 붉은 말을 탄 자는 큰 칼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칼은 권세와 권위를 상징합니다. 칼을 가진 자만이 명령할 권한이 있고, 칼을 가진 자만이 사람들을 통솔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칼은 정치적인 권세를 의미합니다.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통치하는 정치적인 권세를 의미합니다. 이 권세는 하나님이 허락한 권세입니다. 누군가는 백성을 다스려야 하니까, 누군가는 통치권을 갖고 행사해야만 나라의 질서가 잡히니까, 하나님이 누군가에게 정치적인 권세를 허락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 칼을 가진 자가 하는 일이 뭡니까? 전쟁을 일으키고 사람들을 죽이게 합니다. 평화를 제거하고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을 일으킵니다.
여러분, 모든 싸움과 전쟁을 생각해 보십시오. 부부싸움을 비롯해서 모든 싸움이 무엇 때문에 일어납니까? 힘 때문에 일어납니다. 힘을 잃고 싶지 않으니까, 권력을 잃고 싶지 않으니까 싸움이 일어나는 겁니다. 모든 전쟁은 항상 정치 권력과 깊이 연루되어 있습니다. 물론 전쟁이 일어나는 데에는 경제적인 이유, 정치적인 이유, 자연적인 배경, 인간적인 배경들이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습니다만, 그 핵심에는 언제나 정치 권력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전쟁을 일으키고, 전쟁터에 백성을 동원시키는 건 언제나 정치 권력입니다. 바로 이 정치 권력이 역사를 구성하는 첫 번째 요소입니다. 정치권력 때문에 역사가 휘몰아치고, 정치 권력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고, 전쟁으로 인해서 역사의 지형이 변합니다. 정치적인 권세가 불러일으키는 재앙은 말로 다 형언할 수 없습니다. 모든 역사의 비극은 항상 정치권력에 희생당한 백성들의 비극입니다.
세 번째 말은 검은 말입니다. 검은 말을 탄 자는 손에 저울을 들고 있습니다. 저울은 계량과 판매를 상징입니다. 다시 말하면 경제의 상징이요 돈의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라는 이야기는 경제적인 기근을 의미합니다. 김람유와 포도주는 해치 말라는 이야기는 경제 권력의 한계를 의미합니다. 이처럼 검은 말은 경제 권력(돈의 힘)을 의미합니다. 특히 돈 때문에 발생하는 경제적인 결핍과 기근과 같은 경제적 재앙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실 먹고 사는 일은 생존의 필수 조건입니다. 세상만사가 다 먹고 사는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가정 파탄도 경제적인 빈곤 때문에 발생하는 경우가 많고, 수많은 범죄도 가난 때문에 발생합니다. 심지어는 가난 때문에 자식을 유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노사 문제도 경제적인 이해문제 때문이고, 지난 주간에 노르웨이에서 이민 정책을 반대하는 극우민족주의자 안데르스 브레이비크가 정부 청사와 작은 섬에 침입해 이민자의 자녀들을 총으로 사살하는 끔찍한 살인을 한 것도 그 배경에는 먹고 사는 경제적인 문제가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민자들 때문에 백인들이 일자리를 빼앗기고 있는데 왜 이민우호정책을 펴느냐는 겁니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최고의 힘을 가진 우상입니다. 모든 것은 돈에 의해서 좌우됩니다. 돈 때문에 인권이 유린당하고,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이기도 합니다. 돈 때문에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고, 테러를 일으키기도 하고, 국가의 운명을 바꿔놓기도 합니다. 돈과 관련이 없는 역사적 사건은 거의 없습니다. 돈(경제 권력)은 역사적 소용돌이의 핵입니다.
네 번째 말은 청황색 말입니다. 청황색은 죽음의 그늘이 드리운 색입니다. 더욱이 그 말을 탄 자의 이름이 ‘사망’입니다. 그 뒤에는 지옥이 바짝 뒤따르고 있습니다. 그들이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얻어 전쟁과 기근과 질병과 들짐승들로써 죽였습니다. 그러니까 청황색 말은 죽음의 권세를 의미합니다. 죽음의 권세가 사람을 죽이는 방법도 다양합니다. 때로는 질병으로 죽이고, 때로는 전쟁으로 죽이고, 때로는 기근으로 죽이고, 때로는 자연재해로 죽입니다. 죽음의 권세는 지상의 어떤 권세라도 다 굴복시키는 최고의 권세입니다. 이 세상은 죽음이 왕 노릇하는 세상입니다. 알렉산더 대왕도 죽었고, 진시황도 죽었고, 징기즈칸도 죽었고, 나폴레옹도 죽었습니다. 세종대왕도 죽었고 이순신도 죽었습니다. 역사를 지배했던 그 누구라도 죽음의 권세 앞에 굴복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죽음은 이처럼 역사를 지배하는 최고의 권세입니다. 죽음의 재앙으로 뒤덮이지 않은 역사는 없습니다. 죽음은 역사적 소용돌이의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렇습니다. 정치 권력, 경제 권력, 죽음의 권세, 이 세 가지는 역사를 구성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인간의 역사에는 이 세 가지 요소들이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가 전부는 아닙니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한 가지 요소가 더 있습니다. 우리가 빼놓았던 첫 번째 흰 말입니다. 성경에서 흰색은 언제나 구원과 생명, 순결, 그리고 거룩함을 상징합니다. 특히 계시록에서 흰색은 하늘을 상징입니다. 흰 말을 탄자는 다른 말을 탄 자와는 다르게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았습니다. 활을 생각해보십시오. 활은 허공을 날아서 멀리 있는 목표 지점에 정확하게 도착합니다. 비록 날아가는 길도 없고, 목표 지점도 멀리 있지만 명궁은 활을 목표 지점에 정확하게 명중시킵니다. 흰 말을 탄 자는 바로 역사의 명궁입니다. 그는 역사의 최종점을 향해 나아갑니다. 중간 단계에서 보면 하염없이 허공을 날아가는 것 같지만 흰 말은 탄 자는 결국 역사를 역사의 최종점으로 정확하게 이끌어갑니다. 19장에도 백마를 탄 자가 나옵니다.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19:11-13). 그러니까 흰 말을 탄 자는 결국 말씀이신 예수님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린 양이신 예수님은 역사의 봉인을 떼는 분이실 뿐만 아니라 흰 말을 타고서 역사의 전투에 참여하셔서 이기고, 이기고, 또 이기십니다. 그분은 이미 십자가로 이겼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이기십니다.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자는 결국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역사의 소용돌이 밖에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역사의 소용돌이 안에 계시면서 정치 권력, 경제 권력, 죽음의 권세가 승리할 수 없도록 그들의 고삐를 쥐고 계십니다.
물론 눈으로 보기에는 정치 권력, 경제 권력, 죽음의 권세가 역사를 좌지우지하는 것처럼 보이고, 역사를 조건 지으며 이끌어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더 깊이 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권세, 결정적인 권세가 작용하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 하나님의 말씀의 권세입니다. 역사를 깊이 살펴보십시오. 역사 속에는 분명히 흰 말을 타신 분이 일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역사의 알파와 오메가이십니다.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그분은 역사의 알파와 오메가로서 나머지 모든 권세들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정치 권력도 하나님께 허락받은 것 이상 나아갈 수 없습니다. 경제 권력도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할 수 없습니다. 죽음의 권세도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땅의 사분의 일만 죽일 뿐입니다. 그 이상은 안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분명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역사가 끝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 권세들이 역사 속에서 힘을 발휘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린 양 예수가 역사의 주인으로서 역사 속에서 일하고 계시지만 정치 권력과 경제 권력, 죽음의 권세 또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시대, 어느 제도에서나 동일합니다. 과거든 현재든, 민주정부든 독재정부든 상대적인 차이가 있을 뿐이지 근본적으로는 동일합니다. 이 권세들은 모든 역사 속에 항상 존재합니다. 단 한 순간도 그 권세들이 작동하지 않았던 적이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역사는 이 네 가지 권세들의 활동으로 짜여진 직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역사의 현실 속에서는 분명히 정치 권력과 경제 권력, 죽음의 권세가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정치 권력으로부터 자유할 수 없습니다. 돈의 힘으로부터 자유할 수 없습니다. 죽음의 권세로부터 자유할 수 없습니다. 악한 자들만 그 권세에 지배당하는 게 아닙니다.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모든 인간은 다 그 힘들의 지배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을 통해서 공개한 역사의 실상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역사적 사실은 이것입니다. 아무리 정치 권력과 경제 권력, 죽음의 권세가 막강하다 할지라도 그 모든 권세는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말을 타시고 역사의 소용돌이에 뛰어들어서 정치와 경제와 죽음을 통해 심판도 하시고 구원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정치, 경제, 죽음의 권세가 역사를 엉뚱한 방향으로 끌고 가지 못하도록 제어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역사를 하나님이 예정하신 최종적인 목표지점으로 이끌어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의 정치 권력, 로마의 경제 권력, 로마가 휘두르고 있는 죽음의 권세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역사의 현실이 암울할지라도 역사는 예수의 승리로 귀착될 것이니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의 실상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이론이 아닙니다. 허황한 꿈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모든 권세를 무력화시켰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정말 예수의 십자가 승리와 부활의 승리를 믿는 자들은 정치 권력 앞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정치 권력이 힘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정치 권력이 짓밟으면 짓밟힘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정치 권력에 짓밟힐지언정 정치 권력에 무릎꿇지는 않습니다. 경제 권력 앞에서도 당당합니다. 참 믿음이 있는 자들은 가난할지라도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부에도 처할 줄 알고 가난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예수 안에서 배웠기 때문에 가난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죽음의 권세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으로 위협해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도 죽지만 죽음에 굴복하지는 않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람은 정치 권력의 지배 아래 살지만 정치 권력에 무릎 꿇지는 않습니다. 경제 권력의 지배 아래 살지만 경제 권력에 무릎 꿇지는 않습니다. 죽음의 권세 아래 살지만 죽음의 권세에 무릎 꿇지는 않습니다. 죽음은 예수 안에서 이미 패배했습니다. 죽음은 예수 안에서 더 이상 저주가 아닙니다. 죽음은 죄로부터 구속의 수단이고, 인간을 고치시는 하나님의 약이고, 사단을 물리치는 하나님의 무기입니다. 허풍 떠는 게 아닙니다. 백퍼센트 진실입니다.
예수님은 역사 속에서 양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약한 자이면서 동시에 가장 강한 자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도 양면을 갖고 있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람은 가장 약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정말 강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아무리 역사의 현실이 암울하고 캄캄해도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결코 무릎 꿇지 않습니다. 이들은 역사의 종국을 알기 때문에, 역사의 최종적인 승리가 누구에게 있는지를 알기 때문에, 미래에서 다가오는 역사가 어떤 것인지를 알기 때문에 어떤 권세 앞에서도 결코 무릎 꿇지 않습니다. 어떤 시련과 고난 앞에서도 결코 소망과 기쁨을 잃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의 진실을 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힘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열전을 쭉 나열하면서 믿음의 사람의 특징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히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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