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역사의 봉인을 떼다(2) (계시록6:9-11)

새벽지기1 2015. 12. 4. 10:01

 

 

우리는 앞에서 두루마리가 역사 전체를 통시적으로 바라본 역사 너머의 역사 이야기라는 것, 또 두루마리의 봉인을 뗄 때마다 등장하는 말은 역사의 기본 성격이 싸움과 전쟁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네 가지 색깔의 말들은 각각 정치권력 · 경제권력 · 죽음의 권세 그리고 역사의 승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다섯 번째 봉인을 살펴보겠습니다. 다섯 번째 봉인을 떼자 앞서 나왔던 말은 등장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다가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재단 아래에서 큰 소리로 탄원하는 장면이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것 때문에 세상 권세에게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이 거룩하시고 참 되시고 대 주재이신 하나님께 탄원하는데 기도 내용이 이러했습니다. 도대체 어느 때까지 우리의 피를 갚아 주지 않으실 것이냐, 어느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하는 것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역사를 후리는 악한 자들을 심판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죽임을 당한 자들을 꼭 순교한 자들만을 지칭한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증언하는 것 때문에 고난당한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 즉 말씀을 따르기 위해 손해를 보고, 핍박을 받고, 야유와 모욕을 당하고, 굶주리고, 매 맞고, 감옥에 갇히고, 죽임을 당한 모든 자들을 다 포함한다고 보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운 해석이라고 생각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회의 기도라고 확대 해석해도 괜찮다고 생각됩니다. 어쨌든 말씀을 증언하는 것 때문에 고난을 당한 자들이 거룩하신 분, 참 되신 분, 대 주재이신 분에게 간절한 탄원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두 가지 중요한 논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역사의 신비와 내막을 보여주는 두루마리의 봉인을 떼는 과정에 왜 기도가 등장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역사의 두루마리 이야기에 기도가 등장한다는 것은 성도들의 기도가 역사의 중요한 요수로 작용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과연 기도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역사의 요소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대부분 기도를 개인적이고 교회적인 성격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역사적인 성격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국가를 위해서 기도하는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의 의식 속에는 기도가 역사를 움직이는 중요한 요소라는 생각이 거의 없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인간의 역사라고 하는 것이 정치권력, 경제권력, 죽음의 권세가 서로 맞물리면서 복잡하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복잡한 세력들의 싸움판에 순교자들의 기도가 등장한다는 것이 어딘가 생뚱맞다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순교자와 역사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싶은 의혹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실제로 세상의 역사가들을 보십시오. 세상의 역사가들이 순교자들의 증언이나 기도를 역사의 중요한 변수로 취급합니까? 그들에게 순교자는 자기들이 믿는 신앙 때문에 희생당한 자들일 뿐입니다. 종교적 신념을 위해 목숨을 바친 고귀한 영혼으로 평가하는 게 최선이지 역사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수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성경)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증언하다가 죽임을 당한 자들의 기도를 역사의 부유물(찌꺼기)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순교자들의 증언과 기도를 거대한 역사 이야기의 한 부분으로 봅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오하고 훨씬 더 광범위한 영향력을 미치는 역사의 중요 변수로 봅니다. 말씀 증언과 기도를 신앙적 행위를 넘어 역사적 행위로 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관 - 성경적인 역사관의 독특한 특징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만 예배는 요한계시록의 영혼입니다. 요한계시록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예배입니다. 기도 또한 그렇습니다. 기도는 하늘 예배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로 등장합니다. 5장 8절을 보십시오. 하늘에 있는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는데, 그 향은 바로 성도들의 기도였습니다. 또 8장 4절을 보면 향기로운 연기를 통해서 성도들의 기도가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고 있고, 5절에서는 기도의 향연이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천사가 성도들의 기도가 담긴 향로를 제단에서 나오는 불로 가득 채워 담아다가 땅에 내던지자 천둥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뭘 말합니까? 하나님이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기도를 통해서 땅을 심판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다섯 번째 봉인을 묵상하면서 어린 시절에 많이 날렸던 연과 연줄이 생각났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에 연을 많이 날렸습니다. 매년 겨울이면 연을 만들어 겨울 내내 연을 날렸습니다. 바람이 적당히 불면 연이 하늘 높이 올라갑니다. 하늘 높이 떠 있는 연을 보면 기분이 굉장히 좋습니다.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신비한 느낌이 들어요. 하늘 위에 떠 있는 연을 바라보면서 내가 실을 당기면 하늘 위에 있는 연도 따라서 움직입니다. 그러다가 실이 끊어지는 경우도 있는데, 실이 끊어지면 연과 나의 관계도 끊어져 버립니다. 연이 바람을 타고 멀리 다른 동네로까지 날아가 버립니다. 저는 이 기도가 연줄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땅에 있는 나와 하늘에 떠있는 연을 연결해주는 것이 실이듯이 기도도 땅과 하늘을 이어주고, 자연과 초자연을 이어주고, 역사와 역사 너머를 이어주는 가느다란 실과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입니다. 기도는 사람들의 의지와 힘이 작동하는 닫힌 역사의 체계 속에서 역사 너머의 손길을 부르는 유일한 초청입니다. 역사 안에서 역사 너머의 하늘을 바라보는 유일한 지향입니다. 기도가 없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인간의 삶과 역사는 자연이라는 시스템, 역사라는 체제에 닫혀버리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지금보다 더 전쟁과 싸움이 극성을 부릴 것이고, 야만적인 정치권력과 이기적인 경제권력과 잔인한 죽음의 권세가 판을 치는 참으로 무섭고 잔인한 세상이 되고 말 것입니다. 어떤 구원, 어떤 소망도 발견할 수 없는 절대 절망에 몸부림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둠과 죄악으로 닫힌 역사를 열어젖히고 하나님의 빛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닫힌 역사 속에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부르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물론 모든 기도가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듣지 않는 기도도 많이 있습니다(사1:15). 하지만 하나님은 신실한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단지 들으실 뿐만 아니라 그 기도를 통해 역사를 구원하시고 심판하십니다.

물론 요한이 살던 당시의 역사 안에서 보면 순교자들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권세가 하늘과 땅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순교자들의 기도가 무력하기 이를 데 없어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 전체를 통시적으로 바라보면 순교자들의 기도가 결국 로마의 죄악을 심판하는 역사의 동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가 실제로 멸망했으니까 순교자들의 기도가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생각해보아야 할 논점은 순교자들이 올린 기도의 내용입니다. 순교자들은 하나님에게 어느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냐고 호소했습니다. 역사를 농락하는 악한 무리들을 속히 심판해 달라고 탄원했습니다. 여러분!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것 때문에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이라면 적어도 세상의 평화와 회개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의 고결한 영성에 어울리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기도는 하지 않고 어느 때까지 기다려야 하느냐고 푸념 섞인 기도를 했습니다. 자기들을 죽인 자들에게 앙갚음을 해달라고 공격적인 기도를 했습니다.

하지만 순교자들의 기도는 그렇게 피상적인 기도가 아닙니다. 순교자들이 자기들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거나 원수를 갚아달라고 탄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기다림에 지쳤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적인 복수를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들을 심판함으로써 하나님의 정의가 승리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땅히 정복되어야 할 악이 계속 되고 있는 것에 대하여 분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고난으로 충분하니 남아있는 성도들이 불의하게 고난당하는 일은 더 이상 없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뜨거운 피로 외치는 순교자들의 기도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들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응답이 뭐였습니까? 더 기다려야 한다고 응답하셨습니다. 순교자들의 수가 다 채워질 때까지 더 앉아서 기다리라고 응답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게 무슨 뜻입니까? 교회가 아직은 승리의 노래를 부를 때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앞으로도 상당한 기간 동안 핍박과 수난의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런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라고 하는 이 진흙탕 싸움 속에서 교회만 홀로 고고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역사의 현장에 악이 횡횡하고 있고, 세상 사람들이 다 그 악의 의해 짓밟힘을 당하며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는데 교회만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교회이기 때문에 더 큰 아픔을 당할 것이고, 고통의 심연에까지 내려가야 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교회가 지상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어떤 약속도 하지 않았습니다. 정치권력으로부터 보호해주겠다는 어떤 약속도 하지 않았고, 경제적인 재난으로부터 지켜주겠다는 어떤 약속도 하지 않았고, 죽음의 권세에 먹히지 않게 해주겠다는 어떤 약속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은 종말론적 승리였지 역사적 승리가 아니었습니다. 역사 속에서는 오직 참고 인내해야 한다고, 끝까지 견뎌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교회는 어떻게 이야기했습니까? 교회가 역사적 승리를 할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를 잘 믿으면 모든 원수들이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한다고, 물질적인 축복을 받는다고, 낮은 자리에서 높은 자리로 올라간다고, 온 세상이 무너져도 하나님의 사람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물론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지 않는다고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낮의 해도 우리를 상치 못하게 하시고, 밤의 달도 우리를 해치 못하게 지키십니다. 하지만 교회가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지켜주는 건 아닙니다. 마치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슈퍼맨이 나타나서 문제를 해결해주고 돌아가는 것처럼 그렇게 유치한 방식으로는 지켜주는 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자연의 질서대로 그냥 놔두십니다. 교회가 공산주의 혁명의 불길 속에서 불타 없어질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저들의 만행을 즉각 심판하셨습니까? 그냥 놔두셨습니다. 성도들을 죽이고 교회를 폐쇄하는 레닌이나 김일성이나 모택동을 일거에 무너뜨렸다면 속이 시원했을 텐데 전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그냥 놔두셨습니다. 그들이 승리의 개선가를 부르는 것을 그냥 보고 계셨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레닌은 50대에 죽었지만 김일성이나 모택동은 장수의 축복까지 누리면서 잘 살았습니다. 나쁜 놈이 우리를 속여 사기를 쳐도 그냥 놔두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세밀하게 관찰해보십시오. 교회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하심을 받는 사람이 있는지 한 번 살펴보십시오. 인간이 세상에서 겪는 모든 어려움과 위험과 고난을 면제받은 사람이 있는지 한 번 살펴보십시오. 그런 사람이 정말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분, 정말 오해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눈동자처럼 지키시지만 우리가 기대하는 방식이나 교회가 말하는 방식으로 지켜주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요 전혀 지키지 않는 방식으로 지키십니다. 우리가 포착할 수 없는 방식으로 지키십니다. 사실입니다. 아무리 영적으로 뛰어난 감각을 가진 사람이라 해도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는 것을 포착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도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비밀스럽게 우리는 지키십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실력이고 하나님의 탁월함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은 지금까지 여러 환상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린 양 예수, 흰 말을 타신 예수가 역사의 알파와 오메가라고, 흰 말을 탄 자가 이기고 또 이기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즉각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분 안에 있는 교회도 악의 권세를 짓밟고 이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로마의 권세를 깨부수고 교회가 승리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랬습니까? 전혀 그러지 않았습니다. 로마의 권세가 교회를 짓밟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200년 동안 계속해서 피를 흘려야 했고 갖은 핍박과 능욕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교회를 지키지 않았다는 말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을 지키지 않았다는 말입니까? 여러분 하나님이 지켜주지 않아서 순교자들이 피를 흘린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교회를 눈동자처럼 지키고 계셨습니다. 그분의 품에 끌어안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지키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광야에 내버려진 것 같은 처지에 내몰렸었습니다.

 

여러분,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역사의 진실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두루마리를 통해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면책 특권을 가진 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많은 고난과 희생을 당하게 될 것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순교자들의 피가 다 채워질 때까지 기다리고 인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역사 속에서 승리자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인이 역사 속에서 존재하는 모습은 언제나 순교자로 상징됩니다. 정치권력과 경제권력 앞에 짓밟힌 순교자, 이 순교자야말로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종말론적 승리의 그날까지 짊어지고 가야 하는 역사적 존재 양식입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교회가 승리자의 자리에 앉기를 꿈꾸지만 하나님은 교회를 그렇게 디자인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세상의 아픔과 고통의 심연에까지 내려가도록 디자인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어둠과 죄악을 한 몸에 담당하셨던 것처럼 교회도 세상의 어둠과 죄악을 담당하도록 디자인하셨습니다. 세상이 당하는 모든 아픔과 질고를 교회가 다 담당하도록 디자인하셨습니다. 순교자의 모습으로 표출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역사 앞에서 순교자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 바로 이것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진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교회가 약속받은 것은 종말론적 승리이지 역사적 승리가 아니라는 것, 하나님의 구원이 이천년 전에 역사 안에 침입해 들어왔지만 궁극적인 승리는 종말에 가서야 온전하게 성취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이 엄청난 진실을 잊는 순간부터 우리의 신앙은 위태로워집니다. 신앙의 진검승부를 역사 속에서 확인하려고 달려드는 순간부터 신앙은 변질되고 도구화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역사 속에서 신앙을 증명받겠다는 모든 욕망을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왜 굳이 ‘마지막까지 견디는 자에게 승리의 면류관을 주겠다’고 반복해서 말씀하셨는지를 깊이 되새겨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