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금환목사 3444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한복음14:16-17)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시면 아버지께 구하셔서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을 제자들과 모든 믿는 자에게 보내주시도록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세상에 속한 사람은 성령님을 알지도 못하고, 성령님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시고, 부활하..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로마서10:)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로마서10:)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시며, 율법의 완성이시며, 율법의 종결자이십니다. 우리 또한 율법을 지킴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한 것을 우리가 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율법의 요구를 완전하게 이루는 것과 동일합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됨으로 그리스도의 죽음 나의 죽음, 그리스도의 부활 곧 나의 부활이 되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 또한 율법의 요구를 완전하게 다 총족시키게 되었습니다. 나의 죄 때문에 내가 죽어야 하지만 내가 죽지 않고도 나의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고, 내가 살아나지 않고도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에 내가 참여하여 장차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는 날에 "나"도 부활하..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눅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누가복음11:13) 저는 아주 자주 "하나님 아버지께 구하는 것이 부끄럽다, 죄송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아버지의 의미를 조금은 알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며 구합니다. 자녀를 키우면서 느끼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아버지의 마음, 어머니의 마음을 우리 마음 안에 심어 놓으셨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녀에게는 주고 싶고, 해주고 싶고, 마음이 저절로 가고, 관심이 저절로 가는 것이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모순 투성이고, 너그럽지도 못하고, 불완전하고, 해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고, 하나님 앞에 서면 선하기보다 악한 사람이라도 부모..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베드로후서1:20)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베드로후서1:20-21)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 설교하는 목사로서 피하고 싶고, 스스로 경계하려고 하는 것은 "이 본문을 설교하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이 말씀이 "나에게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내가 회개할 죄는 어떤 것인가, 내가 무엇을 해야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 내가 고치고, 변화되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성경의 말씀을 자기 마음에 편한대로, 그냥 어림짐작으로, 아전인수격으로,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의 범주로, 세상의 상식 수준으로 또 누구에..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아니하고..."(살전2:15)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받게 함을 그들이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그들에게 임하였느니라"(데살로니가전서2:15-16)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이면서도 유대인들의 실상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자신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던 많은 선지자들을 죽였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유대인들이 세계 곳곳에 흩어져서는 그곳에서, 바로 데살로니가에서도 바울과 선교팀을 핍박하고, 사람들을 선동하여 쫓아내는 등 하나님을 슬프시게 했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세계 도처에서 그리스도인의 대적이 되어 복음을 전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의 이름이 아름다우니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시편135:3)

"여호와의 집 우리 여호와의 성전 곧 우리 하나님의 성전 뜰에 서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찬송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의 이름이 아름다우니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시편135:2-3) "여호와의 집 우리 여호와의 성전 곧 우리 하나님의 성전 뜰"에 하나님이 임재하셨고, 거기에서 하나님이 믿음의 백성들을 만나 주셨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제사를 받으셨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베풀어 주신 은혜로 신약시대에는 믿는 자 안에 예수님이 임마누엘하시고, 믿는 자들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모인 교회에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건물이 아니고, 믿는 자들의 모임인 교회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믿음의 사람이여, 교회여, 여호와를 찬송하라!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는 찬양을 받으시기..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고후10:1-2)

"너희를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에 대하여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또한 우리를 육신에 따라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에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는 것 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고린도후서10:1-2) 고린도교회는 바울과 디모데와 동역자들, 그중에서도 바울에 대하여 "육신에 따라 행하는 자"로 매도하면서 안 좋은 표현으로 공격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바울이 고린도교회와 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 담대하게 할 말을 다하지만, 고린도교회 성도들과 함께 있을 때는 유순한, 즉 할 말도 제대로 못하는 겁쟁이, 방안퉁수 같다고 비난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멀리 떠나 있을 때는 담대하게 할 말..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렘15:16)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예레미야15:16) 예레미야는 자신에 대하여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어떠한지를 보여줍니다. 우리 나라는 노숙자가 아니면 밥을 구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정말 맛있는 것과 정말 배가 고픈데 살 수 없다면 어쩌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얻어서라도 먹고 싶은 간절한 사모함이 일어나길 바랍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디모데후서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디모데후서1:7-8)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혀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에 놓인 바울이나, 이것을 아는 디모데나 두렵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 모든 영적싸움은 두려움이 동반되어 다가올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평생을 모든 시험과 환난을 이기고, 어떤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던 기라성 같은 사도가 옥에 갇혀 죽음 직전에 있다는 것이 디모데에게는 담대하게 말하지 못하고 숨기고 싶은 일이었을 수도 있고, 겁에 질려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디모데에게 바울은..

"하나님이여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어찌하여 주께서 기르시는 양을 향하여 진노의 연기를 뿜으시나이까"(시편74:1)

"하나님이여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어찌하여 주께서 기르시는 양을 향하여 진노의 연기를 뿜으시나이까"(시편74:1) "명목상 교인"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고, 한국교회에 명목상 교인이 굉장히 많다는 조사 보고서가 있습니다.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명목상 교인은 하나님의 버리심도, 하나님이 진노의 연기를 뿜으심도 모르고, 아예 하나님이 징계나 심판을 염두하지도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시편을 기록한 이는 "어찌하여, 어찌하여"라며 하나님께서 믿음의 백성들을 왜 버리시냐고, 하나님이 친히 기르시는 믿음의 양들을 향하여 왜 진노의 연기를 뿜으시냐고 깊은 탄식과 절규로써 따지듯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죄로 말미암아 이렇게 영원히 버림받은 것 같은, 진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