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예수께서는 이어서 “여기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와 있는 것을 볼 사람들도 있다”(1절)고 말씀하신다. 앞에서 그분은, 자신이 인자로서 다시 오실 것에 대해 예언하셨다. 그 예언이 사실이라는 사실을, 그들 중 몇 사람이 목격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그로부터 엿새 뒤, 그분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신다(2절). 세 제자만 데리고 가셨다는 사실은, 야이로의 딸을 살린 이야기(5:35-43)에서 본 것처럼, 매우 중요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높은 산”은 빌립보의 가이사랴에서 멀지 않은 헤르몬 산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누가는, 예수께서 기도하기 위해 올라가셨다고 전한다(눅 9:28). 예수님은 세 제자를 한 곳에서 기다리게 하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도하셨을 것이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놀라운 광채가 발산되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3절). 게다가, 그분 곁에 난 데 없이 두 사람이 서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4절). 제자들은 두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한 사람은 모세고 다른 사람은 엘리야였다. 그것이 영적 세계의 신비다. 임사 체험을 한 사람들의 증언을 들어 보면, 죽음 너머의 세계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면,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어도, 즉시로 누구인지 알게 된다고 한다. 이 땅에서는 외모로 알아보지만 영적 차원에서는 내면으로 알아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 광경으로 인해 세 제자는 경외감에 사로잡힌다. 잠시 후, 베드로는 초막 셋을 지어 세 분을 모시겠다고 말한다(5절). 그는 엿새 전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했을지 모른다. 그는 자신 앞에 임한 하나님 나라를 붙잡아 두고 싶었다. “초막”(임시 거처)으로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붙잡겠다는 베드로의 말은 코미디처럼 들린다. 마가는, 베드로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6절) 이렇게 말했다고 적는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하자 갑자기 구름이 그들을 뒤덮었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7절)는 소리가 들린다. 제자들은 두려워서 엎어졌다가 고개를 드니 다시 현실이 되었다(8절).
묵상:
변화산 사건은 오병이어의 사건처럼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잠시 임한 사건입니다. 달리 말하면, 감추어져 있던 하나님 나라가 잠시 드러나 현실이 된 것입니다. 보이지 않던 하나님 나라의 한 모습이 세 제자에게 보여졌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이 세 제자에게 드러났습니다. 엿새 전에 예수님이 하신 예언이 세 제자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하나님 나라에 눈 뜨지 못했기에 초막 셋을 지어 세 분을 모시려 했습니다. 베드로에게 필요했던 것은 초막을 지어 세 분을 언제까지나 모시고 사는 것이 아니라, 그의 눈을 떠서 일상 속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 나라 안에서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토록 우리에게 가깝습니다. 과거에 살았던 믿음의 사람들은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눈만 열리면 언제든 볼 수 있도록 가까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때 그 모든 감추어진 현실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우리는 감추어진 그 나라를 믿고 살아갑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우리의 영적 감각이 둔해지려 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깨워 주십니다. 우리가 영적 생활 중에 경험하는 신비 체험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감각을 깨우라는 뜻입니다. 늘 그러한 신비 체험을 이어가려고 애쓰는 것은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 초막을 지으려 했던 베드로와 같은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하나님 나라에 만족하면서, 그 나라를 믿고 그 나라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과제입니다.
기도: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 나라.” 주님, 이 찬송이 저희의 고백이 되기 원합니다. 주님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이 매일 저희의 기도이며 소원입니다. 그 믿음으로 “초막에서나 궁궐에서나” 한결같은 태도로 살아가도록, 주님,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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