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1절부터 3절까지는 ‘기름 부음 받은 사람’에 관한 예언이다. 여기서 “나”(1절)는 누구를 가리키는지에 대해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많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나사렛 회당에서 읽으시고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눅 4:22)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이것이 당신을 위한 예언임을 알리셨다. 히브리어 ‘메시야’는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는 하나님의 영으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얽매인 것을 풀어주고 억압된 사람들을 해방시키며 왜곡된 것을 바로잡아 주시는 구원자이시다.
“주님의 은혜의 해”(2절)는 레위기 25장 6-13절에 나오는 “희년”을 가리킨다. 안식년(7년)이 일곱 번 반복된 다음 해 즉 오 십년 째 오는 해가 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든 빚을 탕감해 주고 구입한 토지를 원주인에게 돌려주며 노예로 잡힌 사람을 풀어 주게 되어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두가 같은 지점에서 새출발을 하게 하는 해방과 자유와 회복의 해다. 그 때가 되면 참된 “위로”(3절)가 유다 백성에게 임할 것이다. 주님께서 그들을 유다 땅에 다시 심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회복된 유다 백성은 “의의 나무”라고 일컬어질 것이다.
4절부터는 예언자의 말이다. 하나님께서 기름 부음 받은 종을 통해 회복시키시면 유다 백성은 황폐해진 성읍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4절), 다른 민족들이 와서 그들을 위해 일해줄 것이다(5절). 그들은 유다 백성을 “주님의 제사장”으로,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6절)로 부를 것이다. 그 때가 되면 그들은 과거에 받았던 수치와 모욕에 대한 갑절의 보상을 받을 것이다(7절).
8절과 9절은 주님의 말씀이다. 주님은 “정의(쯔다카)와 공의(미쉬파트)”를 사랑하신다. 그분은 정의와 공의를 따라 행하시며, 그분을 믿는 이들에게도 정의와 공의를 요구하신다. 그 하나님은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을 통해 유다 백성과 새로운 언약을 맺으실 것인데, 그것은 “영원한 언약”이 될 것이다. 그 언약으로 인해 그들의 자손들은 “주의 복을 받은 자손”으로서 만민에게 알려질 것이다.
10절에서는 3절에서 끊긴 “나”의 말이 이어진다. 그는 주님께서 구원과 의의 옷으로 자신을 단장해 주셔서 그분 안에서 크게 기뻐할 것이라고 말한다. 자신에게 맡겨진 메시아의 사명을 완수할 때 하나님께서 높여 주실 것이라는 뜻이다.
묵상:
구원에 대해 말할 때 보통 “영혼 구원”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성경에도 그런 표현이 나옵니다. 가령, 베드로 사도는 “여러분은 믿음의 목표 곧 여러분의 영혼의 구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벧전 1:9)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말할 때의 “영혼”은 인간 존재의 ‘한 부분'(육신과 분리된 영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중심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로마 문화권에서는 영혼과 육신이 분리된다고 믿었지만, 히브리적 사고에서는 영혼과 육신은 하나로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영혼의 구원”이란 “육신과 분리된 영혼만의 구원”이 아니라 “육신을 포함한 인간 존재 전체의 구원”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에게 영으로 기름 부으셔서 구원자로 세우신 것은 우리의 영혼만을 빼내어 천국으로 옮기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사렛 회당에서 1-3절을 읽으시고 “이 말씀이 오늘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신 후에 가난한 이들, 병든 이들, 억압 당하는 이들, 차별 당하는 이들을 찾아 다니며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게 해 주셨습니다. 희년법을 주시면서 하나님께서 기대하셨던 정의롭고 공의로운 세상을 회복시키려 하셨습니다. 그분은 인간의 영혼만을 보신 것이 아니라 외면과 처한 상황까지 보셨고, 정의와 공의가 깨어진 것에 대해 아파하시면서 그들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에 관심하십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평화의 하나님께서 친히, 여러분을 완전히 거룩하게 해 주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여러분의 영과 혼과 몸을 흠이 없이 완전하게 지켜 주시기를 빕니다”(살전 5:23)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희년의 개인적 성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믿어서 변화된 이들을 통해 희년의 현실이 세상에 이루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을 “희년의 사회적 성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들이 원래의 상태로 회복되고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 일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온전히 이루어질 것을 기다리고 소망하며 이 땅에서 그 일이 이루어지도록 힘쓰는 것이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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