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1절부터 7절까지는 포로로 살고 있던 유다 백성에 대한 회복의 예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창조하신 분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분의 소유다. 그분의 소유인 이스라엘이 바빌로니아에 사로잡혀 있다. 하나님은 당신의 소유인 이스라엘을 다시 찾으실 것이다(1절). 그들이 어떤 고난을 당한다 해도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실 것이다(2절). 이집트와 에티오피아가 페르시아에 멸망 당한 것은 유다 백성을 해방시키기 위한 대속물인 셈이다(3절).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실 것이다(4절). 그분은 바빌로니아에 흩어져 살고 있던 포로들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5-7절).
8절부터 13절은 하늘 법정에 모든 민족의 대표들을 모아 각각 자신이 섬기는 신에 대해 변호하게 하는 장면이다. 주님은 이스라엘을, “눈이 있어도 눈이 먼 자요, 귀가 있어도 귀가 먹은 자”(8절)라고 질책하신다. 그들 앞에서 모든 열방과 뭇 민족에게, 그들이 섬기는 신들에 대해 변호해 보라고 하신다. 하지만 어떤 민족의 신도 미래를 볼 수도, 미래를 예언할 수도 없다(9절). 참된 신은 오직 하나님 뿐이다. 이스라엘은 그 하나님에 대한 증인으로 세움 받았다(10-13절).
14절부터 21절까지에서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에게 하실 일을 구체적으로 예언한다. 하나님은 그들의 “속량자”(14절)이시다. “속량”은 친족을 위해 몸값을 대신 치뤄주어 해방시키는 행위를 가리킨다. 그분은 이스라엘을 속량시키기 위해 바빌론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것은 마치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는 것과 같은 사건이 될 것이다(16-17절). 하지만 하나님이 바빌론에게 하실 일은 이집트에게 하신 일보다 훨씬 더 놀라울 것이다. 18절의 “지나간 일”은 출애굽 사건을 의미하고, 19절의 “새 일”은 바빌론에서 해방되는 일을 가리킨다. 그 일은 이미 시작되고 있다(20절). 그들이 회복되면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21절).
22절부터 28절에서 이사야는 죄악에 빠진 당신의 백성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전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싫증을 느끼고 죄악에 스스로를 넘겨 주었다(22-23절). “너희 죄로 나를 수고롭게 하였으며, 너의 악함으로 나를 괴롭혔다”(24절)는 말씀은 죄의 본성을 잘 표현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심판 후에 그 모든 죄를 용서하신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시는 이유는 그들에게 그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속되게 하지 않으려는 것이다(25절). 그러므로 하나님이 심판 하신다고 해도 그들에게는 변명할 여지가 없다(26-28절).
묵상:
성경을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 중 하나는 ‘하나님의 집요한 사랑과 인간의 집요한 배반’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기에 피로를 느끼시지 못합니다. 그분의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무제한적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하나님의 본성이며 존재 이유이며 존재의 목적입니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은 그분의 완전한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사랑을 히브리어로 ‘헤세드’, 헬라어로 ‘아가페’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반면, 인간은 그분의 사랑에 대해 너무도 자주, 너무도 쉽게 싫증을 느낍니다(22절). 그것이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반복된 일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것도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에 싫증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집요한 사랑은 인간에게 그런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를 멈춘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이기를 멈추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 된 인간은 자격 없이 받는 그 사랑에 너무도 쉽게 무감각해지고 권태를 느낍니다.
여기서 죄의 본질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짓는 죄는 하나님을 수고롭게 하고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24절). 외도하는 것이 배우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행위가 되는 것처럼, 죄악을 탐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죄로 인해 상처 받으십니다. 인간의 죄악에 대해 하나님은 때로 심판하십니다. 하지만 그 심판도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렇기에 심판 후에 그분은 반드시 그들을 용서하시고 회복 시키십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마음에 각인 시키려는 메시지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우리 죄로 인해 상처난 하나님의 마음을 보는 동시에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그분의 사랑을 봅니다. 그 사랑에 마주칠 때 깨어지지 않을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사랑은 너무나도 압도적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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