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1절부터 7절까지는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에 대한 예언이다. 동방에서 일어난 “한 정복자”(2절)는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킨 고레스 왕을 가리킨다. 그는 거침없는 기세로 바빌로니아를 비롯하여 주변 민족들을 정복할 것이다(3절).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고레스를 심판의 도구로 삼으신 것이라고 선언한다(4절). 이 통치자로 인해 온 땅은 두려워 떨 것이다(5절). 두려움에 질린 그들은 서로를 격려하면서 그들의 우상을 붙들고 버티려 하지만 소용이 없을 것이다(6-7절).
8절부터 20절까지는 유다에 대한 예언이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선택한 야곱아, 나의 친구 아브라함의 자손아”(8절)라고 부름으로써 그들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표현한다.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도 않을 것이고 늘 함께 있어 그들을 강하게 하겠다고 약속하신다(9-10절, 13절). 그분은 또한 그들을 괴롭히던 적들을 모두 제거하실 것이다(11-12절). 앗시리아에 이어 바빌로니아의 폭력적 통치 하에서 그들은 지렁이와 벌레처럼 되어 버렸다(14절).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셔서 그들을 회복시키실 것이다(15-17절). 그것은 마치 광야 사막이 초원으로 바뀌는 것과 같이 놀라운 일이다(18-19절). 사람들은 유다 백성의 회복을 보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진실로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20절).
21절부터 29절까지에서 하나님은 이방 민족들이 섬기던 우상들에게 도전하신다. 우상들은 과거의 일도 알지 못하고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는 더더욱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22-24절). “내가 북쪽에서 한 사람을 일으켜 오게 하였다”(25절)는 말은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을 의미한다. 그가 뭇 민족들을 진흙처럼 밟아버릴 것이다. 우상들은 그러한 미래를 알지도 못했고 예언도 못했다(26절). 반면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해 그 사실을 미리 알려 주셨다(27절).
하나님의 이러한 도전 앞에서 우상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28절). 이로써 “부어 만든 우상은 바람일 뿐이요, 헛것일 뿐”(29절)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묵상:
우상은 개인의 길흉화복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우주의 운행과 역사의 흐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아니,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욕구를 실현시켜 줄 도구로 만들어 섬기는 것이 우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참으로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며, 너희가 하는 일도 헛것이니, 너희를 섬겨 예배하는 자도 혐오스러울 뿐이다”(24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상을 예배하는 자들이 혐오스러운 이유는 역사와 사회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오직 개인적인 평안과 형통과 축복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하나님은 우주의 운행과 역사의 흐름을 주관하시면서 개인 개인의 길흉화복에 관심을 두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은 개인적인 평안과 형통과 축복에만 관심을 두지 않고 우주의 운행과 역사의 흐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그 뜻을 이루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 과정에서 필요하다면 개인적인 평안과 형통과 축복을 내려 놓고 하나님의 큰 뜻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합니다.
불행하게도, 오늘의 기독교인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혐오스러운 사람들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자기 중심적이고 독선적이며 배타적이고 희생할 줄 모르는 사람들로 비쳐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뜻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긴다고는 하지만 그분을 향한 우리의 태도가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위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며, 우리에게는 해로운 일이고, 이웃에게는 혐오스러운 일입니다.
믿는 사람들 중에 깎아 만든 신상을 앞에 두고 섬기는 사람들은 드뭅니다. 하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을 우상처럼 취급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아니, 바르게 믿으려는 사람들도 자주 하나님을 우상처럼 생각하고 그렇게 그분을 조종하려는 유혹에 이끌립니다. 성삼위 하나님은 “전부”이시고, 우리는 “전무”입니다. 그분 앞에서 우리는 다만 입을 다물고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기도할 따름입니다.
'좋은 말씀 > -사귐의 소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의 집요한 사랑 (이사야서 43장) / 김영봉목사 (0) | 2024.11.17 |
---|---|
종의 사명 (이사야서 42장) / 김영봉목사 (0) | 2024.11.16 |
위로의 이유 (이사야서 40장) / 김영봉목사 (1) | 2024.11.14 |
히스기야 왕의 실수 (이사야서 39장) / 김영봉목사 (0) | 2024.11.13 |
뜻을 바꾸시는 하나님 (이사야서 38장) / 김영봉목사 (0) | 2024.1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