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귐의 소리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 (이사야서 19장) / 김영봉목사

새벽지기1 2024. 10. 21. 06:47

해설:

19장은 이집트에 대한 예언이다. 이 예언은 유다가 앗시리아에 대항하기 위해 이집트와 연합하려 했던 역사를 배경으로 한다.  

 

1-15절은 이집트의 멸망에 대한 예언이다. “주님께서 빠른 구름을 타고 이집트로 가실 것이니”(1절)라는 표현은 앞 장에서 “내가 나의 처소에서 조용히 내려다보겠다”(18:4)는 표현을 생각나게 한다. 조용히, 은밀히, 드러나지 않게 일하시는 하나님은 때로 태풍처럼, 돌풍처럼 강하고 빠르게 일하기도 하신다. 하나님께서 전광석화처럼 심판을 행하실 때 강성대국 이집트는 졸지간에 멸망할 것이다. 이집트 왕실은 극심한 내분에 시달릴 것이고(2절) 그로 인해 국력은 급격히 쇠약해질 것이다(3절). 자중지란으로 쇠락해진 이집트는 “잔인한 군주”(4절)의 손에 넘어갈 것이다. “잔인한 군주”는 앗시리아의 왕을 가리킨다. 나일 강이 마르고 나일 강변이 황량해질 것이라는 예고(5-10절)는 멸망 당한 후에 재앙을 당하게 될 이집트 백성에 대한 비유다. 

 

“소안의 지도자”(11절)는 이집트의 외교 협상을 담당하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옛 현인들과 옛 왕들의 후예”라고 자부하지만, 외교적인 실책을 반복할 뿐이다. 이사야는 이집트 왕에게 그의 현자들을 불러서 주님께서 하시려는 일을 알아맞춰 보게 하라고 요구한다(12절). “소안의 지도자들”과 “멤피스의 지도자들”(13절)은 이집트의 정사를 주관하던 사람들인데, 그들이 제 꾀에 속아 멸망의 길을 재촉할 것이다(13절). 그 모든 사건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다(14절).  그로 인해 이집트는 총체적인 무기력증에 빠질 것이다(15절). 

 

16-25절은 이집트의 회복에 대한 예언이다. “그 날이 오면”(16절)이라는 표현은 미래에 하나님께서 구원의 손을 펴실 때 일어날 일을 보게 한다. 

 

지금은 유다가 이집트의 도움을 받으려 하지만, 심판이 지나고 나면 이집트 사람들이 유다 백성을 두려워 할 것이다(16-17절). “이집트 땅의 다섯 성읍에서는 사람들이 가나안 말을 하며”(18절)는 이집트에 유다 백성이 이주하여 살게 될 것이라는 뜻일 수도 있고, 이집트 사람들이 가나안 말을 배워 말하게 된다는 뜻일 수도 있다. 어쨋거나 이집트 땅에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이라는 뜻이다. 그로 인해 “멸망의 성읍”이라 불리던 성읍이 하나님께 돌아올 것이다(18절). 

 

그 날이 오면 “주님을 섬기는 제단 하나”와 “주님께 바치는 돌기둥 하나”가 그 땅에 세워질 것이다(19절). 그 제단과 돌기둥은 “만군의 주님”(20절)께서 이집트 땅에 계시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그 때에는 이집트 사람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응답하실 것이다(21절). 이집트 사람들도 만군의 주님을 예배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21절). 주님께서 이집트를 심판하시는 것은 분명하나, 심판 후에는 곧 치유와 회복이 있을 것이다(22절). 

 

그 날이 오면 서로 앙숙이던 앗시리아와 이집트 사이에 큰길이 생겨서 서로 왕래하게 될 것이다(23절). 영토 확장의 야욕으로 약소 민족들을 위협하던 나라들이 그 날에는 그 나라들을 위해 섬길 것이다(24절). 그 때가 되면 이집트와 앗시리아와 이스라엘은 형제 나라가 되고 하나님은 모든 민족의 주님이 되실 것이다(24-25절). 

 

묵상:

“나의 백성 이집트야, 나의 손으로 지은 앗시리아야, 나의 소유 이스라엘아, 복을 받아라”(25절)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본심을 봅니다. 하나님은 “만군의 주님”(20절)이시며 “모든 민족의 아버지”이십니다. 모든 민족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여 선민의 역사를 시작하신 이유는 만민을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한 민족을 선택하실 때 그분의 눈은 모든 민족을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선민으로서 이스라엘은 제사장의 나라로 세워져서 모든 민족을 하나님에게 이끌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영예였고 그들의 책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종착점은 세상의 모든 민족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언어와 문화와 인종의 차이로 갈라지고 흩어져 살던 인류가 하나님의 품으로 모여 하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사해동포주의” 혹은 “세계시민주의”(코스모폴리타니즘)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목표입니다. 다만, 그것은 인위적인 노력으로 이룰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위로부터 오는 능력으로 변화될 때에만 참되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여 죄성을 온전히 치유 받을 때, 비로소 모든 민족과 모든 인류가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2절에서 묘사된 이집트의 상황 즉 “형제와 형제가, 이웃과 이웃이, 성읍과 성읍이, 왕권과 왕권이” 서로 맞서 싸우는 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현실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나라에서 혹은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입니다. 죄성에 물든 존재들이 서로 얽혀 살아가는 것이니, 갈등과 싸움과 분열은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현실 안에 살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하며 미래에 완성될 구원의 현실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지금 우리 가운데 역사하셔서 우리의 죄성을 치유해 주셔서 서로 용서하고 용납하게 하십니다. 그 힘으로 우리는 교회로 모여 하나님 나라를 이룹니다. 우리 가운데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는 완전하지도 않고, 영원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것이 완성될 미래를 바라보며 더욱 겸손히 그리고 더욱 신실하게 서로를 용서하고 용납하기를 힘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평화를 만드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마 5:9)라고 하셨습니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미래의 완전한 평화를 소망하며 현재에 평화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 필요한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