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귐의 소리

열매가 익어가는 자리 (갈 6:1-10) / 김영봉목사

새벽지기1 2024. 7. 27. 06:15

해설:

6장 1절 이하에서 사도는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이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러나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신앙 생활을 하다 보면 여러가지의 도전과 시험을 당할 수 있다. 그럴 경우에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달리 행동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어떤 죄에 빠진 일이 드러나면”(1절)이라는 번역은 원문의 강세를 반영하지 못한다. 정확히 번역하면 “어떤 사람이 어떤 죄에 붙잡힌 것을 보면”이라고 해야 한다. 죄를 짓는다는 것은 죄의 힘에 결박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주기도에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기도하라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성이 약해지면 우리는 언제든 죄의 힘에 넘어지고 결박될 수 있다. 

 

그런 사람을 보면 우리는 판단하고 정죄하는 방향으로 기운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그런 사람을 온유함으로 대한다. 앞에서 사도는 성령의 열매 중 하나로 “온유”를 들었다(5:23). 성경에서 온유는 다른 사람의 죄악을 볼 때 그것을 바로잡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참고 견디며 선을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온유한 마음으로 그런 사람을 바로잡아 주고”라는 말은 그 사람의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여 바로 잡으라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의에 사로잡힌 교만에서 나온다. 온유한 사람은, 자신도 얼마든지 그런 잘못을 범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를 살펴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죄에 사로잡힌 형제나 자매를 보면, 그 사람이 스스로 돌이킬 때까지 기도하고 견뎌주고 참아준다. 

 

그것이 “남의 짐을 져 주는”(2절) 것이며, 그렇게 하여 “그리스도의 법” 즉 사랑의 계명을 성취한다. 만일 죄에 사로잡힌 사람을 책망하고 정죄하여 바로잡아 주려는 마음을 가진다면, 그는 “스스로를 속이는 것”(3절)이다. 각 사람은 가장 먼저 “자기의 일”(4절) 즉 자신이 성령을 따라 살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그렇게 살펴 자신이 큰 죄에 사로잡히지 않은 것을 발견한다면 그 일로 감사할 수 있다(“자기에게는 자랑거리가 있더라도”). 하지만 그것으로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각각 자기 몫의 짐을 져야 합니다”(5절)는 미래 시제로 번역해야 옳다. “자기 몫의 짐”은 자신의 죄로 인해 받게 될 징벌을 의미한다. 믿는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자녀됨의 신분은 영원하다. 하지만 구원 받은 사람들은 누구나 마지막에 하나님 앞에서 이 땅에서 자녀로서 살아온 것에 대해 결산을 해야 한다. 그것을 생각한다면 성령을 따라 사는 삶에 더욱 충실할 수 있다.

 

6절에서 사도는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물질적인 지원에 대해 언급한다. “모든 좋은 것”은 물질적인 필요를 가리킨다.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 혹은 순회 전도자들에 대한 물질적인 지원에 적극적으로 임하라는 뜻이다. “자기를 속이지 마십시오”(7절)는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하십시오”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다. “하나님은 조롱을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라는 말은 그분의 뜻을 알면서도 이런 저런 핑계로 그 뜻을 회피하려는 유혹에 대해 경고하는 말이다. 그분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 분이다.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면 육체와 같이 썩어질 것을 얻고, 성령을 따라 살면 성령처럼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8절). 갈라디아 교인들 중에 물질적인 나눔에 대해 인색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죄에 사로잡힌 형제나 자매를 견뎌 주는 것도 그렇고, 믿음을 전하는 교사나 전도자를 위해 자신의 물질을 나누는 것도 그렇다. 그래서 때로 낙심하고 지쳐 넘어진다(9절). 그렇다고 해서 방관자로 있어서도 안 되고 믿음의 공동체를 떠나서도 안 된다. 바로 이 때 성령의 열매인 “인내”가 필요하다. 인내의 열매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바로잡아 주실 것을 믿고 기회가 되는 대로 모든 이들에게 선한 일을 하게 한다(10절). 믿음의 공동체는 그 일을 실습하고 훈련하는 자리다.

 

묵상:

사도는 5장 22-23절에서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를 열거합니다. 그 아홉 가지가 성령이 맺어내는 열매의 전부는 아닙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때 수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그 중에서 중요한 열매들만은 언급한 것입니다. 그 열매들은 공동체의 생활을 전제합니다. “기쁨”과 “평화”의 열매는 홀로 믿는 사람에게도 맺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 “인내”, “친절”, “선함”, “신실함”, “온유” 그리고 “절제”는 다른 사람과 어울려 살아갈 때에만 맺을 수 있는 열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믿음의 공동체에 속하는 것이 필수라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는 순간, 그분의 영적 가정 안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사도가 “믿음의 식구들”(10절)이라고 표현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공동체는 필수입니다.

 

믿음의 공동체(“교회”)에 속한다는 말은 운명을 함께 한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열고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삶의 애환을 함께 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코이노니아’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서로에게 자신을 열고 연대하여 하나의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럴 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룹니다. 

 

다른 사람들과 연대하여 한 몸을 이루어 살아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피를 나눈 가족들도 함께 살아가다 보면 때로 어려움을 겪는데,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하나의 믿음 안에서 모여 한 몸을 이룬다면 당연히 어려움을 겪습니다. 모인 사람들의 믿음의 수준도 다르고, 살아온 배경도 다르며, 성격과 취향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 상처를 받습니다. 거부 당하고 무시 당하고 배신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일을 당하면 교회를 떠나고 싶어집니다. 교회를 떠나지 않는다면 아무에게도 얽히지 않고 조용히 지내고 싶어합니다. 그것은 자신에게도, 교회에게도 좋지 않습니다. 그런 방식으로는 영적으로 자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을 연습하는 자리입니다. 그런 도전과 어려움은 성령의 열매들을 시험해 보고 키워가는 기회가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조차 성령을 따라 행하기를 지속하면 우리 안에서 열매가 자라는 것을 봅니다. 낙심하고 넘어지려 할 때 “인내”와 “신실”의 열매가 자라고, 상처로 인해 속에서 악의가 치밀어 올라올 때 “친절”과 “선함”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가 자랍니다. 그래서 교회가 귀하고 소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