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매일 묵상

주기도(25) / 정용섭목사

새벽지기1 2024. 6. 28. 07:05

-당신의 나라(5)-

 

     지난 이틀에 걸쳐 바르트의 글을 읽은 그대, 수고가 많으셨소. 우리가 애를 쓰면서까지 이런 신학자들의 글을 읽는 이유는 이런 글들이 신앙의 상투성에서 벗어나는데 약효가 가장 특별하기 때문이오. 일반적인 교회생활이나 개인의 경건생활은 바둑으로 치자면 동네바둑과 비슷하오. 바둑을 아무리 재미있게 둔다 하더라도 실력이 느는 건 아니오. 는다고 하더라도 한계가 있소. 신학자들의 글은 일류 프로기사의 바둑과 같소. 여기 판넨베르크 <신학과 하나님 나라>에서 몇 대목을 발췌 인용하겠소. 그 내용은 앞에서 매일묵상을 쓰기 시작할 때 인용한 것들 중의 일부요. 괄호 안의 숫자는 그 책의 쪽수요.

 

     신약성서와 예수의 메시지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는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수립될 것이다. 이는 곧 하나님 나라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성취될 수 있다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주장에 대한 요하네스 바이스(Johannes Weiss)의 핵심적 반론이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인간의 진보적 노력의 결과를 훨씬 능가하는 우주적 전회(轉回)와 변혁을 포함한다. 하나님은 그의 나라를 일방적으로 수립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와 그의 선행자인 세례 요한은 임박한 미래의 빛 아래서 모든 현상을 폭로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오직 선포만 한 것이다. 이 미래는 아주 놀라운 방법으로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올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인간 역사의 발전이라든가, 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달성된다든가 하는 것이 아니다.(69)

     예수는 유대인들의 희망에 근거해서 하나님 나라가 먼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임박했다고 보았다. 그래서 현재는 저 미래로부터 분리되어 독립되어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미래가 현재를 향해서 명령하고 요구하며, 먼저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이 긴급하고 절대적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각성시키고자 했다. 말씀이 선포되고 받아들여질 때 하나님의 통치가 현재하며 우리는 현재에도 하나님의 미래의 영광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과거와 현재가 미래의 원인이라고 하는 관습적인 억설과는 반대로 현재를 미래의 결과로 보는 것이다.(73)

     하나님의 존재는 하나님의 통치와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종교 철학의 언어로 말한다면 신들의 존재는 그들의 힘이라는 것이다. 유일신을 믿는다는 것은 유일의 힘이 모든 것을 통치한다고 믿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신경의 제 1항을 해설하면서 루터는 천지를 창조할 수 있는 신만이 참된 신이라고 말했다. 자기를 모든 것의 주인으로서 드러내시는 신만이 참되시다. 이것은 유한한 존재자들을 떠나서는 하나님이 하나님일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확실히 다른 어느 누구 또는 어떤 것 없이도 지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이 이해하는 게 옳다. 유한한 존재자들을 지배하는 힘을 가진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본성이다. 하나님의 신성은 그의 통치이다.(75)

     예수는 하나님의 통치를 미래에 속하는 현실성(reality)이라고 선포했다. 이것이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이다. 이 개념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유대교적 대망의 한 전통적 관점이다.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권리주장은 기본적으로 오고 있는 그의 통치에서 제시되어야 한다는 예수의 이해가 새로운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의 통치와 그의 존재는 불가분리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는 아직 존재의 과정에 놓여 있다.(75)

     하나님을 미래의 힘이라고 생각함으로써 ‘하나님’이라는 말은 새로운 구체성을 획득한다. 우리가 ‘미래의 힘’이라고 말할 때 훨씬 더 현실적인 과거나 현재와 비교해서 무미건조하고 막연한 미래라는 개념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미래는 공허한 세계가 아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실제로 미래를 어떻게 경험하는가를 연구해보면 분명하게 드러난다. 미래는 어느 정도 예견할 수 있고 계획할 수 있는 게 사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사람들은 항상 삶을 위협하거나 성취를 약속하기도 하는 어둡고 불확실한 힘인 미래에 직면한다. 과학 철학에서 전개되어야 할 여러 가지 논거를 생각할 때 미래의 모호성에 대한 경험은 단지 현재의 무수한 특수 조건들에 대한 지식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는 게 분명하다. 오히려 이 미래의 모호성 경험은 자연의 사건들 내면에 있는 본질적인 불확실성이나 모호성을 가리킨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사건들의 우연성에 대하여 말한다. 이전에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했던 어떤 것이 특정한 시점에서 이 우연성에 따라 결정된다. 이 우연성은 결코 계획적인 행위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의 원인들을 고려하고 그것들을 인간적으로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려는 모든 노력의 전제이다. 과거와 현재의 포로가 아니라 미래에 직면할 때 겸손은 용기의 좋은 반려자가 된다.(77)

     하나님은 하나의 실존하는 실체가 아니라 오고 있는 나라의 미래이다. 하나님은 이 미래로서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를 증언한 예수를 통해서 존재하였고 또 현재도 존재한다.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은 신앙을 창조함으로써 자유와 생명을 주는 성령으로 세상에 현재하신다. 이 신앙은 만물이 모든 생명의 근원과 깊이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인간의 지각이다. <중략> 그러므로 삼위일체론은 철학적 신 관념에 덧붙여진 단순한 기독교적 부가물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가 그 나라를 선포한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현실성(reality)에 대한 궁극적인 표현이다.(99) (2010년 8월13일, 금,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