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매일 묵상

주기도(24) / 정용섭목사

새벽지기1 2024. 6. 28. 07:00

-당신의 나라(4)-

 

     앞의 글을 읽어보니 어떻소? 바르트의 글을 감칠맛 나게 읽을 수 있다면 그대는 신학적으로 이미 어른이 된 거요. 신학의 거장인 바르트의 영성 안으로 들어간 것이니 말이오. 거꾸로 무슨 말인지 종잡기 힘들었다고 해서 실망하지 마시오. 신학 석사 학위를 받은 이들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오. 어떤 이들은 본인의 신학적 사유가 모자란 탓에 이해하지 못하면서 바르트의 글을 별로 쓸모없는 것으로 매도하기도 한다오. 어리석은 소치요. 자, 이제 바르트의 글 두 번째 단락을 읽도록 하시오.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더 많은 이유 때문에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거기엔 다른 반대가 끼어들 수 없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성탄절과 부활절과 성령강림절로 시작된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활동이 다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저 과거로서만, 이미 되어버린 것으로서만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과거를 돌아봄으로써만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 앞을 내다보면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미래는 과거의 기억할 만한 것을 가져온다는 것, 우리의 과거는 우리의 미래가 된다는 것, 오신 우리의 주님은 다시 오신다는 것, 이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우리는 현재 모든 것을 덮고 있는 이 덮개를 치우도록 간구한다. 탁자를 덮은 덮개와 같은 그것을 치우도록 말이다. 탁자는 그 밑에 있다. 우리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을 볼 수 있도록 이 덮개를 치울 수는 있다. 우리는 왕권의 현실성을 아직 가리고 있는 이 덮개가 치워지도록 간구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변화된 모든 것에 이 현실성이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다. 하나님의 완전한 깊이는 거기에 있다. 우리의 개인적인 삶과 우리의 가족, 교회의 삶과 정치적 사건들, 이 모든 것은 덮개이다. 현실성은 그 뒤에 있다. 우리는 아직 얼굴과 얼굴로 맞대어 보지 못하고 거울에서처럼 불분명하게 영상만 본다. 신문을 보아도 확실하게 알지는 못한다. 우리가 이 현실성을 볼 수 있으려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시적으로 되어야 한다. 흡사 그가 부활절에 가시적으로 된 것처럼, 그가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던 것처럼 말이다.

     그는 존재하게 된다. 그는 벌써 이 새로운 인간의 머리가 된다. 새로운 세계의 머리가 된다. 우리는 이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아지 보지 못한다. 우리는 보기를 기다린다. 즉 우리는 신앙의 방랑 가운데 놓여 있다. 아직 보는 것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즉 그의 삶, 죽음, 부활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명성은 우리 전체 위에, 우리의 삶과 모든 것 위에 펼쳐져 있음이여! 이 세상적 삶의 비밀은 벗겨졌음이여! 이 비밀은 벌써 드러났다. 그러나 우리가 다만 보지 못할 뿐이다. 거기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소동, 이 격정, 과욕, 의혹으로 인해 우리는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하도록 은총을 간구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개혁자들의 해석을 채택하고자 한다. 최소한 이 새 시대의 첫 발자취, 이 승리의 첫 발자취를 보도록 우리에게 은총이 내려지기를 기도한다. 모든 것을 품어주는 아침 햇살이 우리를 허락하여, 우리 스스로 또한 다른 이들과 함께 역사의 사건들을, 바로 그 관점에서 무엇이 우리로 부터 떨어져 나가는지를 볼 수 있도록 기도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졌다. 일반적 계시와 묵시(벧전1:3-12)가 주어졌다. 오신 분에 대한 우리의 신앙이 생동적이 되기를! 이 희망을 갖고 살도록 우리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우리 시대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위한 희망 없이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라고 기도할 수 없다. 우리가 최소한 과거의 모든 우리의 활동이 전체적으로 불충분했다는 것을 약간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서로 투쟁하는 많은 싸움 속에서 아주 작은 존재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특히 의로워 지지 않은 우리의 개인적, 심리적 갈등에서 그렇다. 그러므로 이것을 파악할 수 있기 위해서 오시는 왕권을 보아야 한다. 이 일에 심리학자들이 우리를 도울 수는 없다. 어느 날 태양이 뜨고, 인식의 선물이 임하게 된다. 우리는 오직 부활절이 이 세상에서 일반적 사건이 되기를 기다릴 뿐이다. 그때에 우리는 심리학자들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가 모두 건강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모든 슬픈 일이 사라지게 될 날을 볼 수 있도록 간구한다. 슬픔은 이방인에게나 어울리지,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역시 좋은 모습과 재미있는 유머, 그리고 사랑 안에서 살기를 원한다. 아무도 그것을 억압하지 않고, 이 세상을 자기에게로 이끌어 간다.

     누가복음서에 나오는 주기도를 개혁자들은 다음과 같이 확장시켜 해석한다.(Codex D) 당신의 거룩한 영이 우리 위에 넘쳐나고, 그래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소서! 마태와 누가의 고전적 본문이 원래적임에도 불구하고 재미있는 변형이다. 개혁자들은 본문에 상응하도록 코멘트를 계속한다. 하나님 나라의 오심을 간구할 때 이것은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오심을 간구하는 것이다. 개혁자들의 이러한 확장된 해석은 옳은 처사이다. 그러나 이 말 “당신의 나라”는 완성되어가는 교회와는 절대 다른 그 어떤 것으로 이해되어졌을 때만, 그리고 현재 있는 그 무엇의 종말로서, 또한 사물의 새로운 시작으로서 이해되어질 때만 그렇게 할 수 있다. 다행이 하나님의 왕권 안에서는 교회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가 시작한 것을 완성시켰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게 더 간구해야 한다. 그 분이 그것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제의는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그가 우리와 함께 갖고 있는 인내심을 생각하게 한다. 그의 나라가 오심으로 부터 우리를 갈라 놓으려하는 이 세상의 불안한 시대에 하나님의 인내가 얼마나 필요한지! -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을 한다는 것, 그가 그 종소리를 울리게 한다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지! 그렇다. 성취를 위해 하나님 나라는 도래해야 한다.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을 지킨다는 것,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으로서의 그것을 움켜 잡으려한다는 것이 확실하다. 당신의 나라가 온다는 것, 그리고 이미 도래한 이 나라가 온다는 것을 기도해야 한다. 이처럼 우리는 이렇게 소박한, 그리고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간구로 그에게 아주 가까이 다가간다.(2010년 8월12일, 목, 햇빛, 가끔 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