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매일 묵상

주기도(22) / 정용섭목사

새벽지기1 2024. 6. 27. 06:53

-당신의 나라(2)-

 

     아래는 특강 발제문의 두 번째 인용이오. 예수 사건과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한 설명이오. 이런 설명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데 무슨 소용이 있는지, 혹시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오? 그 대답은 이 자리에서 하지 않겠소. 언젠가는 저저로 알게 될 것이라 믿소.

   

      예수님의 축귀와 치유 사건도 하나님 나라와 직결된다. 축귀와 치유는 바로 하나님 나라의 속성인 해방과 자유를 가리킨다. 인간을 모든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현대의 사회과학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 성서시대의 축귀와 치유에 해당된다. 이런 부분에서 가끔 오해가 발생한다. 축귀와 치유를 기계적인 사건으로 보는 것이 그것이다. 복음서의 축귀와 치유는 하나님 나라의 비유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다는 사실에 대한 상징이지 하나님 나라 자체는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 어떤 것으로도 완전하게 규정될 수 없는 종말론적인 생명 능력이기 때문이다. 쉽게 생각해보라. 축귀와 치유는 우리의 정신과 몸이 해방되는 사건이다. 정신과 마음의 건강이다. 이런 건강도 시간이 지나면서 약해진다. 그런 것을 하나님 나라 자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 나라에 전적으로 몰두했던 예수님이 당하신 처참한 운명이다. 여기에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무조건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과만 연결해서 생각한다. 예수님 당시에 십자가 처형은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가장 수치스러운 사건이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 1:23) 하나님을 잘 믿은 결과가 십자가라니, 이처럼 억울한 일이 어디 있는가? 신구약성서를 통 털어서 가장 어려운 신학적인 문제는 신정론(神正論)이다. 하나님이 의롭고 전능하신 분이라면 왜 이 세상에 무죄한 이들이 고난받고 불의한 이들이 득세하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욥기도 이에 대한 문제 제기이다. 이에 대한 완벽한 대답은 아직 없지만 여러 시도가 있었다. 십자가 신학은 그 중의 하나이다. 무죄한 자의 고난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고난당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새로운 하나님 개념이 현대신학에서 등장한다. 이런 하나님 개념은 이미 초기 기독교에서 캐노시스 그리스도론으로 시작된 것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 2:6-11)

 

     한국교회에는 승리주의 신앙이 압도한다. 믿는 자는 모든 것이 잘된다는, 잘되어야 한다는 확신이 너무 강하다. 물론 신자들이 세상에서도 편안하게 사는 걸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거기에만 매달리는 게 문제이다. 더 원칙적으로 말하면 고난과 고통이 오히려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참된 길이다. 팔복에서 가난하고 우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은 단순한 신앙적 수사가 아니라 신앙의 실질이다. 세상에 희망을 걸만한 것이 없는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간절히 기대한다. 이런 점에서 모든 것을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만 하는 죽음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 나라와 명실상부하게 일치하는 사건인 셈이다.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이 많을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판넨베르크는 이런 말을 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이후로는 그 어떤 실패도 더 이상 완전한 실패로 끝나지 않게 되었다고 말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인 승리를 가리킨다. 하나님 나라에 절대적으로 순종했던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하고 삼일 후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사건이야말로 믿는 자들의 승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정확하게 알려준다. 바로 앞에서 십자가 사건을 말하면서 승리주의를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승리주의와 부활의 승리는 전혀 다르다. 부활은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차원의 생명으로 변화되는 사건이다. 새로운 차원의 생명이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부활논쟁에 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마 22:30) 부활 생명은 우리가 여기서 최고의 행복한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형식의 삶과 전혀 다르다. 부활생명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으로부터만 가능하다. 부활과 창조는 똑같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이라는 말이다. 창조는 무로부터 일어난 것(creatio ex nihilo)이다. 없음과 있음 사이에는 절대적인 간격이 놓여 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오직 창조주의 것이다. 부활은 재생이 아니다. 예수님은 다시 죽을 몸으로 되살아난 것이 아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주권이며, 하나님의 승리이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하나님의 생명 통치라 할 수 있다.(2010년 8월10일, 화, 소나기, 구름,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