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매일 묵상

주기도(21) / 정용섭목사

새벽지기1 2024. 6. 27. 06:49

당신의 나라(1)-

 

     주기도의 두 번째 간구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이오. “당신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여기서 ‘당신의 나라’(바실레이아 수)는 하나님 나라(바실레이아 투 데우)요. 하나님 나라는 앞에서 언급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와 깊이 연결되오. 하나님과 하늘은 동의어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그 하늘에 계신 분만이 우리의 생명을 지키는 아버지이오. 하나님 나라는 그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나라요. ‘하나님 나라’를 주제로 지난 7월20일 마산재건교회에서 특강을 했소. 발제문의 일부를 여기 옮길 테니 참고하시오. 두 번으로 나누겠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의 처음 설교, 또는 복음선포의 내용은 ‘하나님의 나라’이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마 4:17)이다. 팔복의 첫 항목에서도 ‘천국’이 언급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도대체 하나님 나라는 무엇이며,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경험하는가? 신자들의 가장 일반적인 생각에서만 본다면 죽은 뒤에 가게 될 천당이 곧 하나님 나라이다. 묵시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하나님 나라는 최후의 심판 뒤에 오는 새 예루살렘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우주론적인 대변혁이다. 이런 하나님 나라 표상은 분명히 지금 여기서의 삶과 전혀 다른 차원이다. 여기에 조금 더 실질적인 질문을 하자. 천당에 가면 지상에서의 삶이 기억나는가? 어떤 모습으로 사는가? 자식들이 세상 나이로 부모보다 더 오래 살다가 죽어서 천당에 갔다면 자식들이 더 늙은 모습을 하고 있을까? 이런 질문에 딱 떨어지는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죽기 전에는 아무도 궁극적인 세계를 직접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옳다면 단지 죽어서 가는 천당만을 하나님 나라라고 말할 수는 없다. 궁극적인 하나님 나라는 죽음 뒤에, 그리고 마지막 심판 뒤에 오지만 그 나라가 오늘 여기 우리의 삶과 연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마음의 천국을 말한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언제 임하는가 하고 묻는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 안에’ 있다고 대답하셨다.(눅 17:21) 그렇다면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바로 하나님 나라라는 뜻인가?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생각을 지적하려고 이 말씀을 하신 것이지 사람 관계가 하나님 나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비롯해서 전체 삶은 하나님 나라와 직결된다. 예수님의 비유를 보라.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주제로 한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 포도원 주인의 비유,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 탕자의 비유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 나라는 변혁의 힘으로 임한다. 우리의 모든 고정관념을 무너뜨린다. 예컨대 ‘포도원 주인의 비유’에서 주인은 한 시간 일한 사람이나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이나 모두 한 데나리온을 지급했다. 하루종일 일한 사람이 불평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주인은 자기의 돈을 자기 뜻대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딴지를 걸지 못하게 했다. 하나님의 고유한 능력으로 당신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이다.

 

공생애 중에 바리새인들이 왜 예수님과 그토록 심각하게 갈등을 겪었는지도 이런 데서 알 수 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업적에 심취했지만 예수님은 온전히 하나님의 통치에만 몰두했다. 자신들의 종교적 기득권을 인정해주지 않는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것이다. 이에 반해서 세리와 죄인들은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그 이유는 하나님 나라가 종교적인 차원이나 세속적인 차원에서 내세울만한 것이 없었던 자신들을 있 그대로 받아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들에게도 똑같이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전했다.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믿음 이외에 아무 것도 없었다. 있는 그대로의 사람을 인정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을 도덕적으로 바른 사람이 되라고 다그치지도 않았다. 자기의(義)로부터의 해방이다.

 

     하나님 나라와 기독교인의 윤리도 새롭게 정리되어야 한다. 우리는 늘 어떤 규범을 찾기만 한다. 사람의 삶에 규범이 필요하긴 하지만 그것이 절대적인 가치가 있는 건 아니다. 바울의 설명에 따르면 규범, 즉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할 뿐이지 의롭게 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율법이 죄를 짓게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 7:8,9) 율법은 이원적이다. 한편으로는 죄를 분별하게 하는 긍정적인 면이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죄를 짓게 하는 부정적인 면이 있다. 하지 말하는 것은 더 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심리가 여기에 들어 있다. 하나님 나라는 단지 조금 더 도덕적이냐 아니냐의 차원의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통치의 차원이라는 말이다. 거기서는 죄인도 여전히 의롭다고 인정받는다.(2010년 8월9일, 월, 햇빛과 구름과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