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매일 묵상

주기도(19) / 정용섭목사

새벽지기1 2024. 6. 26. 05:26

-거룩한 이름(5)-

 

     하나님 앞에서 사람은 거룩한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소. 하나님을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런 경험도 불가능할 거요. 거룩한 두려움은 낯선 것에 대한 경험이라고 앞에서 말했소. 하나님을 전적으로 낯선 이로 경험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만이 거룩하기 때문이라오. 이것도 이미 앞에서 언급했소. 하나님만이 거룩하다는 말이 무슨 뜻이겠소? 잘 들으시오. 사람은 하나님을 거룩하게 할 수 없소. 사람이 아무리 거룩한 태도로 예배를 드린다고 해도 그것으로 하나님이 거룩해지는 건 아니오. 자기의 전 재산으로 이웃을 구제하고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놓는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는 바울의 말을 기억해 보시오. 하나님의 영역을 사람이 간섭할 수 없다는 뜻이오.

 

     헬무트 틸리케는 하나님의 거룩성을 태양으로 비교했소. 아주 적절한 비유인 것 같소. 태양이 밝은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태양 자체의 능력이오. 우리는 무슨 노력으로도 태양을 더 밝게 할 수 없소. 그런 노력을 시도하는 것은 주제 파악이 안 되었다는 말이 되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태양빛으로 나가는 거요. 그늘에 앉아 있으면서 태양빛을 원망하는 것도 우스운 꼴이오. 태양빛에 나가기만 하면 아무 노력을 하지 않아도 빛과 열을 받을 수 있소. 태양빛에 노출된 돌을 향해서 따뜻해지라고 말할 필요가 없는 것과 같소. 문제는 사람들이 스스로 태양이 된 듯이, 또는 태양을 도와서 빛을 내게 할 수 있다는 듯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오.

 

그대는 위의 설명을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성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다면 제 멋대로 살라는 말인지, 아무런 방향이나 목적도 없이 살라는 말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이오. 그게 우리의 딜레마이고, 또한 그 맥락을 설명하기 어렵소.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할 일이 거의 없지만 무언가는 해야 하기 때문이오. 우리가 할 일이 없다는 말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야겠소. 자극적으로 들리더라고 이해하시구려. 내가 오늘 밤에 차를 타고 가다가 큰 사고를 만나서 큰 장애를 입거나 죽을 수 있소. 사고는 내가 아무리 조심해도 피할 길이 없소. 크게 부부싸움을 하거나 실연을 당한 젊은이가 죽기를 작심하고 차를 난폭하게 몰고 가다가 내 차와 부딪치는 일이 벌어질 수 있으니 말이오. 그런 불가항력은 우리 주변에 흔하오. 더 나가서 지구에 빙하기가 다시 찾아오면 거의 모든 생명은 지구에서 살지 못하오. 그건 각자가 조심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오. 그렇지만 사람이 손 놓고 살 수는 없소. 가능한 최대한으로 생명을 살리는 길을 찾아 가야 하오. 그게 어느 정도나 가능할지는 나도 잘 모르겠소.

 

     정리해서 이렇게 말하겠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 원한다는 기도는 두 가지 차원이 있소. 하나는 하나님이 하나님다워지는 세상에 대한 갈망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세상에 기꺼이 참여하겠다는 결단이오. 전자가 주(主)고, 후자가 종(從)이오. 우리 함께 기도합시다.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2010년 8월7일, 토, 지낼만한 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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