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이름(3)
앞서의 이야기를 다시 정리하겠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기를 바란다고 하지만, 실제로 하나님께는 이름이 없으며, 이름을 붙일 수도 없다오. 여기서 말하는 ‘이름’은 오히려 하나님의 행위라고 보는 게 맞소.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해내라는 명령을 내리신 그분의 행위가 그의 이름이오. 아브라함을 부르신 그 행위가 하나님의 이름이오. 이 말은 하나님이 행위로 존재하는 분이라는 뜻이기도 하오. 따라서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기도는 하나님의 행위가 거룩하게 드러나기를 바란다는 의미요.
우선 ‘거룩’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게 좋겠소. 이사야라는 예언자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특별한 환상을 목도했소. 그는 천사들이 다음과 같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고 하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사 6:3) 모세의 호렙 산 전승에서도 이런 말이 나오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 그대는 이런 성서의 표현을 실질적으로 생각해야 하오. 도대체 무엇이 거룩하다는 것이오? 예루살렘 성전은 당대의 최고 건축물이니 그 앞에서 서면 무언가 거룩한 감정을 느낄 법도 하오. 로마에 있는 베드로 성당 같은 중세기 종교 건축물에 들어가면 느끼게 되는 그런 것과 비슷하오. 그러나 아무리 종교적인 품위가 가득한 건축물이라 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거룩한 것은 아니오. 거기에 사용된 건축 자재는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것이오. 히말라야 높은 산에 올라서면 거룩한 감정을 느낀다고 하오. 그렇다고 해서 산 자체를 거룩하다고 말할 수는 없소.
거룩하다는 말은 하나님 경험에서만 나올 수 있소. 이미 이 세상에 있거나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어떤 것에서는 거룩한 경험이 불가능하오. 컴퓨터를 생각해보시오. 얼마나 뛰어난 기계인지 모르겠소. 아무리 신기한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컴퓨터를 거룩하다고 말하지는 않소. 간혹 사람을 성자라고 말하기는 하오. 그러나 사람 자체가 거룩한 존재는 아니오. 거룩한 힘이 그를 사로잡고 있다는 뜻일 뿐이오. 거룩하다는 말은 이 세상의 어떤 사물이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경험에서만 가능한 말이오. 거룩하다는 말과 하나님 경험이라는 말이 순환하고 있소. 거룩한 이가 하나님이고, 하나님은 거룩한 이이오. 하나님 경험은 곧 거룩에 대한 경험이고, 거룩에 대한 경험이 곧 하나님 경험이오.
여기에 어울리는 다른 용어는 영광이오. 이사야는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사 6:3)는 외침을 들었소. 바울의 진술을 들어보시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영광(카봇)은 하나님의 실존을 가리오. 그것을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직접 경험할 수 없소이다. 이게 우리의 딜레마요. 직접 경험할 수 없으나 반드시 경험해야 할 어떤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서 완전히 무감각해졌소. 그것에 대한 관심도 없소. 마치 세상에서도 아무 생각 없이 주어진 대로 사는 것과 비슷하오. 이는 곧 우리의 신앙생활에 거룩한 빛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말이오. 하나님의 카봇을 손짓해야 할 설교자들도 여기에는 맹탕이오. 브레넌 매닝의 말을 들어보시오.
나는 예수님 얼굴에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강론이나 설교를 평생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현대 설교자들이 이 주제의 설교에 인색한 것은 어쩌면 우리가 하나님의 카봇과 한 번도 스친 적이 없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단순히 우리가 개념을 설명할 엄두가 안날 수도 있다. <중략> 그러나 신비를 피하는 것은 곧 경배와 영광을 찬송 받기에 합당하신 유일하신 하나님을 피하는 것이다. 아울러 그것은 구도자들과 신자들 양쪽 모두의 갈증을 채워주지 못한다. 일요일 아침 우리의 잡담거리나 되는 점잖고 사무적인 로터리클럽 풍의 하나님을 거부하고, 경외와 말없는 공경과 전폭적 헌신과 전심의 신뢰를 받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을 찾는 자들의 영적 갈증을 말이다. (브레넌 매닝, 윤종석 역, 신뢰, 복있는 사람, 83 쪽)
오늘 일반 신자들의 신앙생활이나 설교자들의 설교나 모두 성서의 가장 중심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영광 개념을 완전히 놓친 상태요. 브레넌 매닝의 지적처럼 시시껄렁한 에피소드로 시간을 소비하고 있소. 좀 과하게 표현해도 이해하시구려. 이런 공동체에 아직도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정신 건강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요? (2010년 8월5일, 목, 뭉게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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