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매일 묵상

주기도(16) / 정용섭목사

새벽지기1 2024. 6. 25. 05:33

거룩한 이름(2)

 

     그대는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고 생각하시오? 만약에 이름이 그 사람을 규정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께는 이름을 붙일 수가 없소.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규정할 수 없으니 말이오. 하나님도 그분의 원래 이름은 아니고, 여호와도 이름은 아니오. 하나님에게는 이름이 있을 수 없소. ‘만사를 규정하는 현실성’(die alles bestimmende Wirklichkeit)을 우리가 어찌 규정한다는 말이오. 그냥 ‘주’라고 하든지, ‘당신’이라고 불러야 마땅하오.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은 출애굽과 바벨론 포로 귀환이오. 출애굽 사건에 하나님의 이름과 연관된 이야기가 나오오. 모세는 우연하게, 또는 작심하고 호렙 산에 갔다가 타지는 않지는 불이 붙은 떨기나무를 보았소. 거기서 하나님을 경험하오. 그는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렸다고 하오.(출 3:6) 바로에게 학대당하는 이스라엘 자손을 끌어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소. 자기를 보낸 하나님이 누구인지, 이름이 무엇인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려달라고 했소. 대답은 이렇소.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출 3:14) “개역개정역의 난외주에 “나는 나다.”라고 나오오. 루터는 이렇게 번역했소. “Ich werde sein, der ich sein werde.”(나는 존재하게 될 바로 그 존재이다. 나는 나로 존재할 것이다.) 이 말이 같은 구절에 반복해서 나오오. 이어서 15절에서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고 되어 있소. 이상하지 않소? ‘스스로 있는 자’는 이름이 아니오. 존재의 근거가 내부 있다는 뜻이오. 이것은 도덕경의 첫 머리와 비슷한 개념이오.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 명가명 비상명(名可名 非常名).

 

     솔직하게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시오. 모세에게 출애굽이라는 ‘미션 임파시블’을 명령하신 하나님은 누구요? 우리가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그는 누구요? 그대는 몇 가지 대답을 알고 있을 거요. 그분은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고, 앞으로 세상을 심판하고 완성하신 분이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육신을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우리를 진리로 이끌어주시는 성령이라고 말이오. 이런 대답을 단지 교리문답의 차원이 아니라 세계의 차원으로 아는 게 필요하오. 어제 글의 마지막에 지적한 것을 기억하오? 음악 경험을 실제로 한 사람의 노래와 단지 기술에 떨어진 사람의 노래가 다르다고 했소. 겉으로는 그 차이가 확 드러나지 않아서 사람들은 눈치를 채지 못하지만 그 차이는 엄청난 거요.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음악 경험을 하는 것과 비슷하오. 그것이 없으면 결국 하나님 경험을 불가능하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신학공부를 전문적으로 해야만 한다는 뜻은 아니오. 신학적인 마인드는 필요하오. 세상을 살면서 전문적인 철학공부는 없어도 삶을 성찰하는 마인드가 필요한 것과 같소. 그래서 우리는 지금 “스스로 있는 자”인 그분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주기도의 한 대목에 대해서 신학적 성찰을 나누고 있는 중이라오.(2010년 8월4일, 수, 뜨거운 햇살, 연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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