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매일 묵상

주기도(23) / 정용섭목사

새벽지기1 2024. 6. 28. 06:53

-당신의 나라(3)-

 

     아래의 글도 특강 발제문에 들어 있는 건데, 바르트의 “주기도”(Das Vaterunser) 62-71 쪽의 내용을 발췌 번역한 것이오. 바르트의 글은 그의 독특한 신학적 착상을 이해하지 못하면 따라가기가 쉽지 않소. 그래도 여기서는 설명을 생략할 테니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어보시오. 두 번에 나누어 싣겠소.

 

     하나님 나라는 신약성서 안에서 볼 때 이 세상의 삶이며 목적이다. 그 삶과 목적이 바로 창조자의 의도와 부합되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 나라는 죄로 인해 발생하는 위협에 대항하는 방어물이며, 이 세상에 잠복해 있는 죽음의 위험과 파괴성에 대항하는 방어물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위협들은 피조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죄를 극복하는 최종적 승리이다. 또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세상의 사면이다.(고후 5:19). 이 사면의 결과들이 여기에 있다. 즉 새로운 세상, 새로운 시대(Neue Äon), 새 하늘과 새 땅이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평화 안에 돌입한 것이며, 하나님으로 부터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정의이며, 창조자의 정의이며, 의롭다 인정하시고 승리하시는 주님의 정의(Gerechtigkeit)이다. 이 세상의 마지막과 그 목적은 의의 나라(Königreich)가 오시는 것이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Dein Reich komme! 분명한 것은 우리가 충만한 새로움에 역행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것들은 우리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뛰어넘어가고 있다. 우리 자신인 모든 것, 그리고 우리가 행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가장 좋은 조건들 밑에서, 그리고 그 자체의 위험 밑에서 위협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모든 해방, 모든 승리, 모든 속죄, 그리고 중생이 필요하다. 왕의 나라가 오심은 우리의 능력과 무관하게 완성된다. 우리의 존재와 가능성의 공간인 창조에서와 같이 그의 오심을 위해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에 있어서 우리는 무능력하다는 말이다. 나라가 임함은 다만 우리 기도의 대상이 될 뿐이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완성할 수 있다. 모든 충만케 하는 행위 안에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인산? 결정적인 칭의 안에서. 세상의 완성을 위해 필요한 세상의 정의와 평화가 문제이다. 이것은 그분의 활동으로 인한 결과일 뿐이다. 우리는 기도해야만 한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이 사건의 시간이 시작되도록 종을 우리소서!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라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 이것은 이렇게 기도한 사람이 이 나라를, 이 생명을, 이 정의를, 이 새로움을, 이 속죄를 알고 있다는 것과 또한 이러한 것들에 낯설지 않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그는 이러한 것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기도하는 그것에 왕의 나라가 벌써 임박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됨 안에서, 그리고 친구됨 안에서 “우리의 아버지”라고 기도하는 이 아주 특별한 상태에 우리는 직면한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이것은 많은 것을 의미한다. 당신의 나라는 벌써(schon) 임했다. 당신은 우리 사이에 그것을 세우셨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 안에 있다.”(눅 17:21)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채우셨다. 당신, 하나님 아버지,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과 더불어 이 세상을 속죄했다. 이처럼 여러 의미가 담겨 있다.

     사도 바울은 이 속죄에 대해 하나의 미래에 일어날 사건인 것처럼 말하지 않는다.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용서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이미 발생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은 합법적으로 죄와 그 모든 결과들을 없이 하셨다. 그 안에서 당신은 모든 낯설은 그리고 원수와 같은 폭력을 없이 했다. “나는 벼락처럼 사탄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눅10:18)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위협의 죽음에 이르는 위험을 당신은 극복했다. 당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 이상 죽지 않는 새로운 인간이 되셨다. 이 일은 발생했다. 그 안에서 당신의 나라는 이 세상에 현재적으로 되었다. 완전한 깊이에서, 그의 주권의 전체성 안에서, 어느 것에도 축소됨이 없이, 비밀 됨이 없이 그렇게 되었다. 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종말과 목적에 도달했다. 즉 종말과 심판과 죽은 자의 부활, 이 모든 것이 벌써 그 분 안에서 발생했다. 이것은 우리가 미래에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그런 사건이 아니다. 이미 우리 앞에 일어났다. 그것은 역시 하나의 과거의 사건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이방인에게 선교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바로 교회가 이미 오신 주님에게 시선을 돌리는 것이다. 교회는 성탄절, 성금요일, 부활절과 오순절을 기억한다. 이것들은 매우 좋은 것이지만 그것 자체로서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우리가 하나의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려는 어떤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정확한 것이며, 이미 일어난 것이다. 우리는 성육신을 전하며, 오신 하나님 나라를 전한다. 슬프고 삭막한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궁극적인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말씀이 육신이 된 그 곳에, 그분이 오신 그곳에 세워지기 때문이다. 이 궁극적 말씀은 선포되었다. 우리는 이 사건 위에서 살아간다. 그 외의 다른 더 이상의 것은 없다. 성탄과 부활로 시작되는 그 시간을 더 이상 역행시킬 수 없다.(2010년 8월11일, 수, 태풍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