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편견을 넘어 자유의 복음으로(사도행전10:24~48) / 이재훈 위임목사

새벽지기1 2024. 6. 24. 06:08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해지기 위해서 수고하는 이들이 부딪치는 여러 장벽이 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불신자들의 마음의 완고함이 장벽입니다.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의 차이로 인한 장벽도 있습니다.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해지는 사명에 비해 일꾼이 부족한 것도 장벽입니다. <사도행전>을 통해 발견되는 또 하나의 장벽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마음속에 있는 ‘편견’입니다. 신앙인의 편견입니다. 편견은 선입관이나 고정관념과 다릅니다. 선입관(preconception)은 어떤 체험에 앞서 가지는 주관적인 판단입니다. 모든 선입관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것은 옳고, 어떤 것은 잘못됐습니다. 고정관념(stereotype)은 한 문화와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지식입니다. 어떤 고정관념은 잘못되었지만, 어떤 고정관념은 맞기도 합니다. 그러나 편견은 언제나 잘못된 것입니다. 잘못된 선입관, 잘못된 고정관념이 고착화될 때 균형을 잃고, 치우친 생각으로 언제나 그릇되는 것을 편견이라고 합니다.
편견은 이유가 없습니다. 편견에 빠지면 생각 없이 속단해 버립니다. 죄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무너뜨릴 때 그 결과가 편견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해지지 못하는 죄의 결과가 옛자아의 영향력으로 남아 편견으로 자리 잡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습니다. 교회공동체에서 신앙생활 하면서도 교회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면 더 자유로워지고, 복음 안에서 더욱 풍성해야 하는데, 더 좁아지는 까닭은 편견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편견, 세상에 대한 편견, 교회에 대한 편견이 있습니다. 좋은 의도로 시작한 제도나 문화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편견과 만나서 굳어지면 아무도 바꾸지 못하는 무서운 고집이 됩니다. 복음 안에서 풍요로운 자유와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편견이 지배하는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사상적 우상’이라는 편견
베드로에게도 편견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뿐만 아니라 많은 유대 그리스도인, 신앙인들에게 편견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유대 민족을 택하셔서 오랫동안 함께 하셨고, 그 민족을 통해 일하셨다는 것을 깨닫고 체험한 유대 민족이 가진 편견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구약만 인정하고, 신약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것 또한 편견입니다. 구약시대의 세계관으로 현대를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3년 동안 예수님과 동행했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성령을 체험했고,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고, <사도행전> 역사에서 병자를 고치고, 욥바에서 죽은 다비다를 소생케 하는 놀라운 표적으로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하는 증인이었습니다. 그 베드로에게도 편견이 있었습니다. 베드로에게도 편견이 있었다면 우리에게도 편견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10장에서 백부장인 고넬료가 예수님을 믿고 변화되는 과정에서 베드로의 편견과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편견이 나타납니다. 고넬료는 로마의 고급 장교로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환상을 봅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욥바에 와 있는 베드로를 초청해 데려오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베드로에게 사람을 보냅니다. 그가 욥바에 가까이 올 때 베드로도 환상을 봅니다. 그가 배가 고파서 무엇인가 먹을 것이 없냐고 할 때 하늘에서 큰 보자기가 내려왔는데, 그 안에 온갖 네 발 달린 짐승들과 땅을 기어 다니는 것들, 공중의 새들이 있었습니다. 그때 음성이 들려옵니다.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 보자기 안에 있는 생물들은 <레위기>에서 먹지 말라고 규정되어 있는 부정한 것들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말도 안 됩니다. 저는 불결하고 더러운 음식은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레위기>에서 규정하고 있는 불결한 동물을 잡아먹으라고 하시니 먹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내가 깨끗하다고 선언한 것을 네가 불결하다고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오랫동안 율법을 따라 살아온 유대인으로서 베드로의 대답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먹으라”고 명하시는 분이 그 율법을 주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주신 분이 이제 그 율법이 폐지되었음을 알리는 말씀을 주시는데도 그럴 수 없다고 막아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타나는 신앙인의 편견 첫 번째는 하나님보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더 중요시하는 ‘사상적 우상’입니다. 유대인들이 신약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가 구약의 하나님만 인정하는 사상적 우상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성령 안에 있었기에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고, 이제는 자신들의 삶과 사역을 통해 하나님이 새로운 역사를 일으켰다는 것, 율법이 폐지되었다는 것을 성령 안에서 깨달았기에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고넬료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고넬료의 집에 함께하도록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단어가 “깜짝 놀랐다”, “깨달았다”, “이제야”, “참으로” 같은 깨달음의 고백입니다. 이것이 편견이 깨어지는 과정입니다.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의 중요한 특징은 날마다 편견이 깨지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옛자아의 영향력, 죄로 인하여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 들어온 편견이 하나씩 벗겨져야 복음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심을 부정하는 도전
두 번째 편견은 하나님이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심을 부정하는 도전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야 내가 깨달았습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겉모양으로 차별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를 행하는 사람들이라면 어떤 민족이든 받아 주신다는 것입니다’”(34~35절).
하나님이 유대 민족을 먼저 부르신 것은 차별이 아니라 구별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대 민족을 통하여 모든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해 먼저 부르신 것뿐입니다. 그런데 먼저 부름 받은 이들이 자신들만의 하나님으로 하나님을 제한하는 편견의 죄성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는 것,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할례 받은 신자들이 그를 비난하며 ‘당신이 어떻게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있소?’라고 물었습니다(행 11:2~3). 
베드로를 비난하는 이들은 분명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편견에 사로잡힌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시험에 든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도 갖고 있는 편견의 문제를 끊임없이 복음 안에서 자유롭게 하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이해하기 힘든 집단이 됩니다. 열심히 신앙생활 하면서 자신을 감옥에 가두게 됩니다. 
“그들은 이 말을 듣고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들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허락하신 것이로군요’라고 말했습니다(행 11:18).
정말 당연한 말을 너무 진지하게 하고 있는 것 같지만, 편견이 깨어지면서 사람들이 변화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실 ‘이방’이라는 단어 자체가 편견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을 베드로와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편애로 오해해서 
선민의식에 빠지는 편견
세 번째 신앙인의 편견은 하나님의 선택을 편애로 오해해서 선민의식에 빠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3일째 되는 날 예수를 살리셔서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미리 선택하신 증인들, 곧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 함께 먹고 마셨던 바로 우리에게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파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의 심판자로 그리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가 바로 자기임을 증언하라고 하셨습니다”(40~42).  우리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우리를 증인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은 것은 나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믿음은 선택의 이유가 아니라 결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기에 믿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통해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하나님 선택의 목적이 선교임을 깨닫게 됩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 19:5~6 개역개정).
하나님의 선택은 우리가 온 세계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장의 소명을 받는 것입니다. 또 복음을 통해 우리가 편견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때 모든 이들이 동일한 성령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고 있을 때 말씀을 듣고 있던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내려왔습니다.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은 성령의 은사를 이방 사람들에게까지 부어 주시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사람들이 방언으로 말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들렸던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이 사람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성령을 받았으니 물로 세례 주는 것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44~47절).
계속 놀랍니다. 베드로가 이방인과 식사를 한 것에 놀라는 것을 시작으로 그들에게도 성령이 임하고, 방언과 찬양이 임하는 동일한 성령을 체험하는 것을 보고 놀랍니다. 편견이 심한 사람은 자신이 어떤 은혜를 받으면 그 체험이 자신에게만 있다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믿는 이들에게 필요한 은사를 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의 은사를 주시고, 다른 사람에게는 다른 은사를 주십니다. 모든 이들이 복음으로 인해 성령의 은혜와 축복을 누리게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복음을 통해 편견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때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사람들로 변화됩니다. 우리 안에 편견이 무너져 갈 때 하나님을 닮고, 그분의 마음을 닮고, 그분의 자녀다운 자녀가 되어갑니다. 하나님이 택하여 주신 것을 자만과 자신의 영광으로 생각하는 무서운 편견입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부어진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도 무서운 편견입니다. 따라서 선교에 헌신하지 않는 사람은 편견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 안에 있는 편견이 모두 깨어져야 선교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편견이 깨어졌듯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순종하며 나아갈 때 편견이 깨어집니다. 많은 나라와 민족을 경험한 사람들의 생각이 넓을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그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실 때 그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자유의 복음을 더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한 영혼, 한 영혼이 예수님을 믿고, 변화되는 것을 보면서 복음 안에 주어지는 풍성한 자유를 누리고, 우리 안에 있는 많은 편견이 깨어지고, 우리가 하나님을 더욱 닮은 자녀로 변화되어 갈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 자유를 끊임없이 누리려면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