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그리스도인입니까?(행11:19~30) / 이재훈 목사

새벽지기1 2024. 6. 25. 05:50
예배드리는 성도님들에게 누군가 “당신의 종교는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한다면 어렵지 않게 “기독교입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하십니까?”라는 질문에도 “네. 저는 정기적으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매주 예배에 참여합니다”라고 쉽게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세 종류 반응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글쎄요. 매주 예배는 참여합니다만…” 말꼬리가 흐려진다면 예수님과의 관계가 가깝지 않은 분일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네. 그렇습니다만  부끄러운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담대하게 “네.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는 대답으로 끝낼 수 있다면 예수님과의 관계가 건강하게 형성된 분일 것입니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관계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내가 살아계신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 속에 있는가? 그래서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 속에서 신앙이 평가 되는 것입니다. 정기적으로 예배에 출석하고, 어떤 활동에 참여한다 할지라도 예수님이 나와 어떤 관계인지 스스로, 다른 사람들에게, 세상 한복판에서 그리스도인이라 고백할 수 없다면 무엇인가 돌아봐야 하는 신앙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안디옥교회의 출현과
처음 ‘그리스도인’이라 불린 사람들
성경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 혹은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기록이 오늘 본문에 등장합니다. 지금까지는 ‘제자들’ 혹은 ‘성도들’, ‘형제들’ 혹은 ‘믿는 사람들’, ‘그 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크리스티아누스’입니다. 당시 헤롯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헤로디아누스’, 가이사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카이사리아누스’라고 불렀습니다. 당시 언어와 문화, 습관과 양식을 따라 붙여진 것입니다. ‘크리스티아누스’는 처음에는 약간 비꼬는 말투 혹은 익살맞은 별명처럼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보면서 예수님을 생각하게 하고, 예수님을 전하는 그들의 모습 속에 예수님이 보이는 모든 과정을 통해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다는 게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이 모여서 “이제 앞으로 우리를 어떻게 세상 속에 표현할 것인가? 그리스도인이라 부르자”고 결의해서 시작된 게 아닙니다. 누구로부터 시작됐는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에게 “저들은 크리스티아누스”라고 불리는 것에서 시작되었다는 게 중요합니다. 당시 성도들의 모습을 통해 예수님이 생각나고, 예수님이 보여지고, 예수님이 전해지는 모습이 있었기에 그 용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처음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린 성도들은 안디옥에 있는 제자들이었습니다. 안디옥은 팔레스타인 북쪽에 있는 시리아의 도시입니다. 로마제국에서 로마가 가장 크고, 그 다음이 알렉산드리아, 세 번째가 안디옥입니다. 당시 로마제국의 대도시 대부분이 타락했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다양한 민족이 모이는 도시였기 때문에 선교적 가치가 매우 높았습니다. 시리아의 안디옥에 복음이 전해지고, 교회가 세워지고, 그곳에 있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렸다는 기록이 오늘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역사의 중요한 터닝포인트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사도행전> 2장 오순절에 성령님이 강림한 사건 다음으로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 안디옥 교회의 출현입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나타난 것처럼, 예루살렘교회에 베드로조차 가지고 있었던 이방인에 대한 편견,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신 것에 대한 오해, 잘못된 선민의식, 율법에 갇혀 있고, 구약 역사에 고정되어 있으며, 유대 문화에 복음을 가두려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 일반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은 더 심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이 흩어져서 복음을 전하지만, 예루살렘교회가 온 세상을 향한 선교의 전초기지가 되기에는 부족함이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있었다면 가능하겠지만, 하루속히 복음이 확산해야 하는 시급성에 비해서는 예루살렘교회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편견이 모두 사라지고, 변화되기까지 기다리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기에 예루살렘교회를 뛰어넘어 안디옥교회가 세계 선교의 중심이 되는 사건이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출현한 것입니다. 바로 그 안디옥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처음 불리게 됐습니다. 저는 세계 선교의 중심이 된 안디옥교회의 출현과 그 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관점에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제자 됨의 정체성을 지켰기 때문에
어떻게 선교의 중심지가 된 안디옥교회 성도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을까요? 그들이 어떤 모습이었기에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을까요?
첫째,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제자 됨의 정체성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그 무렵 스데반의 일로 인해 핍박을 받아 뿔뿔이 흩어진 사람들은 페니키아, 키프로스 그리고 안디옥까지 건너가 유대 사람들에게만 말씀을 전하고 있었습니다”(19절).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은 핍박으로 인해 강제적으로 흩어졌습니다. 흩어졌지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됨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비록 흩어졌지만 그들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환경과 상황이 바뀌어서 변화되는 것은 진짜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 신앙과 예배당 밖에서 신앙이 바뀌는 것은 올바른 제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라고 질문했을 때 당당하게 대답할 수 없는 사람은 예배당에서의 모습과 예배당 밖에서 흩어진 교회로서 살아갈 때의 모습이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 예배드릴 때만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예배당 안의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예배당 밖의 세상 속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모이는 교회로서만이 아니라 흩어진 교회로서도 존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루살렘교회에 처음 핍박이 왔을 때는 왜 흩어져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흩어져 존재했을 때, 그곳에서도 말씀을 전했을 때 흩어짐을 통해 ‘하나님이 복음을 전하고 계시는구나’, ‘우리를 사용하시는구나’를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의 제자 됨의 정체성, 일터에서나 가정에서나 어느 곳에서든지 그것을 포기하지 않고, 그대로 나타날 때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종과 문화 뛰어넘어 복음을 전하기 때문에
둘째, 그리스도인들은 인종과 문화를 뛰어넘어 복음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키프로스와 구레네 출신인 몇 사람은 안디옥으로 들어가 그리스 사람들에게도 주 예수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하셔서 많은 수의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왔습니다”(20~21절).
흩어진 성도들이 흩어진 곳에서도 말씀을 전한 것은 귀하고 감사한 일인데,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한계를 보여준 것입니다. 키프로스와 구레네 출신인 몇 사람이 이 한계를 뛰어넘어 변화를 일으킵니다. 안디옥에 있는 그리스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놀라운 패러다임 전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흩어진 유대인들은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습니다. 물론 1차적으로 언어와 문화가 같기 때문에 접근하기 쉬워서 그랬을 것입니다. 바울도 어느 곳에 가든지 항상 회당을 먼저 찾아 복음을 전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소수 사람이 그리스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의 중요한 터닝포인트입니다.
미국에 많은 한인교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인교회들이 한국 사람에게만 복음을 전하려고 합니다. 한인교회로서만 존재하려고 할 때 위기가 옵니다. 다민족이 모여 있는 사회에서 한인들만 모이는 사회, 아프리카인만 모이는 사회, 스페인어를 쓰는 사람들만 모이는 사회를 표방하는 것은 사도행전적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다. 인종을 얼마나 뛰어넘으려고 노력하는지가 그리스도인 됨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교회의 본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목회할 때 한인교회에 도전했습니다. “우리 교회의 비전은 ‘한인’이라는 타이틀을 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님들과 결의를 했습니다. “우리는 한식을 해먹지 말자.” 이민교회에서 밥을 해먹는 것이 거의 예배에 육박할 만큼 중요하게 생각되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모여서 밥을 먹는 것을 귀하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국처럼 밥을 하면 우리에게는 익숙하지만, 외국인에게 그 냄새가 견디기 힘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밥을 해먹지 않도록 했습니다. 권사님들의 열화와 같은 지지를 받았습니다. 간단하게 커피와 도넛으로 끝입니다. 드시고 싶으면 집에 가서 드시면 됩니다. 그랬더니 주변에 있는 소방서, 학교, 지역에서 “교회를 빌려서 회의를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 마을에서 가장 깨끗한 건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냄새도 안 나고, 깨끗하게 관리하니까 이용도가 높아졌습니다. 소방서에서 회의를 하다가 어떤 소방관이 “나도 이 교회 예배에 참석하겠다”고 했습니다. 음식 하나 안 해 먹었더니 그런 효과가 있었습니다. 많은 이주민이 오고, 외국 사람들이 방문했을 때 한국 사람들만의 냄새를 내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처음에는 유대인들만 사람으로 보인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한국 사람만 사람으로 보면 안 됩니다.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어떠한 인종과 문화에 대한 편견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그것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해외에 살다 보면 자녀들이 국제결혼도 합니다. 사실 ‘국제결혼’이라는 말 자체가 틀린 말입니다. 언어와 문화가 통하면 인종과 언어가 크게 제한 될 수 없습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다른 나라 사람은 안 된다”라고 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 ‘주의 손이 함께하셨다’는 말씀이 19절이 아니라 20절 다음에 나온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19절에서  유대 사람들에게만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말씀이 아니라 그리스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는 말씀 다음에 나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들이 유대인에게만 집중할 때는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리스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온누리교회가 언어와 문화를 뛰어넘어 모든 민족을 품으려는 마음으로 달려왔기 때문에 주의 손이 함께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나라와 민족, 우리 교회만이 아니라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나라일지라도, 그 나라의 소식을 듣고 함께 기도해서 우리의 지경을 넓힐 때 주의 손이 함께 하실 줄로 믿습니다. 모든 족속을 향한 교회가 온누리교회의 정체성입니다. 이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포기하지 않으면 주의 손이 함께 하실 줄로 믿습니다. 
안디옥교회는 어느 특정한 지도자에 의해 개척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 사람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소수의 창의적인 사람에 의해 개척되었습니다. 오늘날 중국 교회와 비슷합니다. 중국에 교회들이 개척되고 있는데, 어느 지도자가 개척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에 의해 우후죽순 일어나고 있습니다. 중국 교회의 가장 심각한 상황은 지도자가 없는 것입니다. 지난해에도 10여 명의 중국 성도들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중국에서는 모일 수가 없으니까 한국에서 기도원을 빌려서 수련회를 하는데 강사로 와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너무 급하게 연락이 와서 도저히 스케줄을 조정할 수 없어서 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가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중국 교회에 지도자가 없습니다. 어느 경로를 통해서든지 복음을 듣고 변화되는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는데 중국에 신학교를 세울 수 없어서 저희가 제주도에 훈련센터를 만들었습니다. 중국 교회 지도자들을 훈련시키는 목적으로 세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에게 나타나는 일입니다. 
영적 성장을 위해 
서로를 세워주기 때문에
셋째,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성장을 위해 서로를 세워주기 때문입니다. 안디옥에서 많은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예루살렘교회가 바나바를 파송해서 그들의 영적 성장을 지원합니다. 
“이 소식이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전해지자 그들은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보냈습니다. 바나바는 안디옥에 도착해 하나님의 은혜가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며 온 마음을 다해 주께 끝까지 충성하라고 그들 모두를 격려했습니다. 그는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주께 나오게 됐습니다”(22~24절).
바나바가 안디옥교회를 개척한 것이 아닙니다. 소수의 사람들이 그리스 사람에게도 복음을 전했더니 주의 손이 함께 해 많은 사람이 왔습니다. 그래서 바나바가 파송된 것입니다. 바나바가 안디옥교회에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먼저 기뻐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바나바는 그들이 하나님께 충성하도록 격려했습니다. 자신에게 충성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충성하도록 격려했습니다. 그리고 사울을 데려다가 안디옥교회에서 함께 사역했습니다. 
“그리고 바나바는 사울을 찾으러 다소로 가서 그를 만나 안디옥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하여 바나바와 사울은 1년 내내 그곳 교회에 머물면서 많은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안디옥에서 제자들은 처음으로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불리게 됐습니다”(25~26절).
바나바가 보여준 훌륭한 영적 지도력은 사울을 다소에서 데려와 안디옥교회 성도들을 양육하고 돕도록 세운 일입니다. 바나바가 세우지 않았더라면 사울이 <사도행전> 무대에 들어서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바나바의 착한 마음,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은 ‘내가 꼭 그 일을 해야 한다’가 아니라 나보다 더 잘 할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 부르신 사람, 충성되게 소명을 감당하고 있는 사람을 세워주는 리더십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보여준 동역 덕분에 안디옥교회가 세계 선교의 중심이 되고,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동역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모델이 되었습니다. 세상은 늘 함께 일하는 사람과 경쟁하고, 동업은 반드시 실패한다는 것을 진리처럼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바나바와 사울이 보여주었던 동역이 가능한 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안디옥 교회가 이 과정을 통해 선교 중심 교회가 되었고,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둘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함께 모이나 흩어지나 어떤 상황에서도 제자로 살아가는 이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나만의 믿음, 우리만의 믿음에 머물지 않고, 모든 민족을 향해 나아가는 이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세우고, 영적 성장을 함께 이루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온누리교회가 선교의 중심 교회로 더 귀하게 쓰임 받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저들은 참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평가받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