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핍박자를 증인을 부르시다 (행 9:1~19) / 이재훈목사

새벽지기1 2024. 5. 18. 04:08
바울은 교회를 대적하는 소위 ‘안티(anti) 기독교의 원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마음으로 거부하고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들을 제거하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일에 주동적 역할을 했고, 그 일을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스데반의 죽음 이후 예루살렘에서 일부 사도들 외에 모두 흩어졌지만, 거기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가장 많은 그리스도인이 도망간 곳이 다메섹인데 거기까지 찾아가서 그들을 처벌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다메섹은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약 240km를 가야 합니다. 당시에는 일주일 이상 여행해야 하는 지역인데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해서 그 일을 계획했습니다. 대제사장과 산헤드린의 명령이 아니라 바울이 기획한 것입니다. 허락을 받아서 그 일을 집행한 것입니다. 
핍박자 바울을 부르신 이유
“한편 사울은 여전히 주의 제자들을 위협하며 그들을 죽일 기세로 대제사장에게 나아가 다메섹의 여러 회당들에 써 보낼 공문을 요청했습니다. 거기서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남자와 여자를 가리지 않고 잡아다가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기 위해서였습니다”(1~2절).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이들을 처벌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 확신만큼 열정을 쏟아부었습니다. 바울이 이처럼 지나친 열심을 보인 것은 심리적으로 과도한 행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치우친 이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자신의 열정에 자기가 속아서, 자기 스스로 포로가 되어서 어떤 행동을 해도 모두 옳다고 합리화합니다. 충격적인 사실은 격분하고 있는 사람을 예수님이 찾아오시고, 부르셔서 증인으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왜 그를 부르셨을까요? 그 많은 사람 중에 왜 이방인의 사도로 그를 세우셨을까요? 그가 가장 강하고, 강력한 대적자요, 핍박자였기 때문에 바울을 부르신 것입니다. 어떠한 사람도 복음의 대상자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것, 핍박자인 바울까지도 은혜의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이라는 것,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람도 제외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시기 위해서 바울을 택하여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행하지 않는 일을 말씀하신 분이 아닙니다. 산상수훈은 예수님 삶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핍박하는 바울을 위해 기도하셨고, 축복하셨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대적자를 대리자로, 
핍박자를 증인으로
“사울이 길을 떠나 다메섹 가까이 도착했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비춰 그를 둘러쌌습니다. 사울이 땅에 쓰러졌습니다. 그때 그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울이 ‘주여, 누구십니까?’라고 묻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지금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3~6절).
부활하신 예수님이 바울을 찾아오셨습니다. 갑작스러운 사건이 아닙니다. 예비된 사건입니다. 갑자기 하늘로부터 강렬한 빛이 그를 비추었습니다. 다메섹에 가서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있는 그때 하늘로부터 빛이 비추었는데, 태양빛이 아닙니다. 태양보다 더 강렬한 빛이었습니다. 여러분, 태양은 빛의 근원이 아닙니다. 모든 빛이 태양을 통해, 발광체를 통해 주어지기 때문에 마치 태양이 빛이 근원인 것처럼 착각하는데, 태양은 빛을 반사하는 발광체일 뿐입니다. 빛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빛을 창조하시고, 태양을 통해 빛을 우리에게 비춰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태양이 사라져도 빛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영광의 빛이 사울에게 비춘 것입니다. 엎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편견과 고집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는 때로 초자연적 사건이 필요합니다. 그 강렬한 빛이 그의 눈을 멀게 할 뿐만 아니라 그의 영혼까지 비추었습니다. 물리적인 빛만이 아니라 하나님 영광의 빛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둠에서 빛이 비치라’고 명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비추셨기 때문입니다”(고전 4:6). 
강렬한 빛과 함께 예수님이 사울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매우 인격적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이름을 두 번 부르십니다. 매우 따뜻한 부르심입니다. 친밀한 부르심입니다. 사무엘을 부르실 때도 “사무엘아 사무엘아”라고 부르셨습니다. 바울은 이 순간까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제자들이 꾸며낸 이야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분노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니까 얼마나 충격이었겠습니까? “왜 나를 핍박하느냐”는 질문도 충격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핍박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는데 예수님이 당신을 핍박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는 그분의 몸이 되었기 때문에 교회, 곧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핍박은 예수님에 대한 핍박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 나를 핍박 하느냐?”는 질문은 예수님이 몰라서 묻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것은 몰라서 질문하신 게 아닌 것처럼, “왜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질문은 인격적으로 스스로 생각하고, 돌이키도록 요청하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신 찾아오심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강렬한 빛으로 땅에 엎드려지게 하셨지만, 인격을 무너뜨리지 않으시고 스스로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주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러자 주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이제 일어나 똑바로 서거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너를 내 일꾼으로 삼아 네가 본 것과 앞으로 내가 네게 보여 줄 것을 사람들에게 증언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내가 이 백성과 이방 사람들에게서 너를 구원해 이방 사람들에게로 보낼 것이다’”(행 26:15~17). 
예수님이 자신을 핍박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하는 자를 증인으로 부르시고, 일꾼으로 부르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복수입니다. 예수님의 복수는 은혜의 복수입니다. 더 큰 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대적자를 대리자로, 핍박자를 증인으로, 한 팀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령의 사람들은 핍박자를 자신의 증인과 일꾼으로 부르신 예수님처럼, 대척점에 있는 사람, 나를 반대하는 사람, 때로는 나를 모함하는 사람을 동역자로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인격적으로 찾아오시는 것처럼 인격과 인내, 사랑과 포용으로 나와 다른 지점에 있는 사람을 한 팀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믿음과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이제 그리스도를 위해 핍박 받는 자!
“주께서 아나니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어서 ‘곧은 길’이라고 부르는 거리로 가거라. 그리고 그곳에 있는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을 찾아라. 지금 그가 기도하고 있다. 그는 환상 가운데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와서 자기에게 손을 얹어 다시 보게 해 주는 것을 보았다’”(11~12).
앞을 보지 못해서 기도밖에 할 수 없는 사울을 찾아가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건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부르심을 체험하고, 기도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도움이 필요합니다. 눈을 뜨게 하는 일을 아나니아를 통해 행하십니다. 예수님이 아나니아에게 “가라”고 했을 때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가겠습니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제가 들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온갖 해를 끼쳤고, 이곳에 온 것도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가려고 온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결론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의 대답은 당시 바울의 핍박을 받았던 모든 성도의 마음을 대변한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어쩌면 그들은 하나님이 바울을 심판해 주시기를 기도했을지도 모릅니다. 강렬한 빛으로 눈이 멀게 된 것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그렇게 된 거라고 여기고, 고소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아나니아에게 “가서 그를 위해 기도해 주라”고 하시니까 선뜻 갈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책망하듯 아나니아에게 강력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주께서 아나니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거라! 이 사람은 이방 사람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사람들 앞에서 내 이름을 전하도록 선택한 내 도구다. 내 이름을 위해 그가 얼마나 많은 고난을 당해야 할지 내가 그에게 보여 줄 것이다’”(15~16절).
아나니아가 그 음성을 듣고 순종해서 그에게 안수함으로 그가 다시 보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한국 교회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은 일곱 분 중 한 분이 이기풍 목사님입니다. 가능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분은 어릴 때부터  사회지도층,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미워했습니다. 학문적인 소양도 있었습니다. 당시 그는 서양 선교사들을 나라를 삼키려는 음흉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미워했습니다. 그래서 평양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무엘 마펫 선교사의 얼굴에 돌을 던져서 턱이 부서지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펫 선교사님은 꾸준히 복음을 전해서 1894년 22명에게 학습, 7명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평양에 예배당을 세웠습니다. 그것이 장대현교회입니다. 장대현교회가 세워진다는 소식을 듣고 이기풍이 깡패들을 동원해서 건축 현장을 부숴버렸습니다. 그러나 마펫 선교사는 성도들을 달래고 인내하며 그들을 스데반처럼, 천사처럼 대했습니다. 그래도 이기풍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이기풍이 잠을 자는데 꿈에 예수님 환상을 보았습니다, “기풍아 기풍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바울이 들었던 음성을 그대로 들은 것입니다. “너는 나의 복음의 증인이 될 사람이다.” 깜짝 놀라서 잠에서 깼지만 그래도 무시했습니다. 그러다 청일전쟁 당시 원산으로 피신 가 있을 때 그의 앞에 선교하던 스왈렌 선교사님이 나타났습니다. 그가 이기풍을 보자마자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하늘에서 울리는 우렛소리와 같았다고 했습니다. 결국 그 선교사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평양 시내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한국의 사도 바울이 되었습니다. 1907년 평양대부흥이 일어났던 그 해에 장대현교회에서 한국 교회 최초의 7인의 목사 중 한 사람으로 안수를 받았습니다. 한국 교회 역사에도 사울처럼 예수님을 핍박하고, 교회를 핍박하던 자를 돌이켜서 복음 증거자, 증인으로 세우신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을 붙잡으려 갔다가 그리스도께 붙잡힌 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자였지만, 이제 그리스도를 위해 핍박 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고 살아계신,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도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처음부터 분별력 있고, 하나님이 예뻐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반대점에서 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을 때로 오해하고, 핍박했던 이들을 부르셔서 증인으로 삼으시는 역사를 베푸셨습니다. 그 역사는 계속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