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치유의 기적, 구원의 초청장이 되다 (행 9:32~43) / 이재훈목사

새벽지기1 2024. 6. 20. 05:45
오늘 말씀은 베드로를 통해서 일어난 치유의 기적으로 많은 사람이 주께 돌아오게 되는 구원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를 믿는 자는 나보다 더 큰 일도 하리라”고 하신 말씀 그대로, 성령 받은 사도들의 사역을 통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일하시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예루살렘 성전 문 앞에 앉아 있던 한 병자를 고쳤던 베드로가 이제는 유대 여러 도시, 예루살렘 밖 유대 지역 곳곳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통로가 되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앞서 빌립이 사마리아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는데, 이제 다시 베드로가 등장인물이 되어서 온 유대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기록을 보여줍니다. 이 두 사람의 사역이 보여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 복음이 유대 지역을 넘어 이방인에게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유대 지역에 유대인만 있는 게 아닙니다.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당시 그리스 헬라 문명 시대에 많은 이방인이 있었는데, 그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둘째, 치유의 기적이 이방인들이 예수님께 돌아오게 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때로 병 고침을 받는 치유의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이 기적은 사도들이 행한 게 아니라 살아계신 그리스도가 그들을 통해서 행하신 기적입니다. 그 기적은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도록, 그래서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하나님의 초청장입니다. 
<사도행전> 9장 마지막 부분에 베드로가 두 지역에서 사역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성경의 지명으로는 ‘룻다와 욥바’입니다. 욥바와 예루살렘 가운데 있는 곳이 룻다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벤 구리온 국제공항이 있는 지역입니다. 욥바는 텔아비브에 나중에 포함되었는데, 그 지역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남북으로는 애굽에서 시리아로 올라가는 중간에 있고, 샤론 평야로 이어지는 곳이기도 합니다. 동서로는 예루살렘에서 욥바로 가고, 남북으로는 애굽과 시리아를 연결하는 요충지에 있는 지역이 룻다입니다. 구약에서는 ‘롯’이라고도 불리는 지역입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을 떠나 룻다로 가고, 또 룻다에서 욥바로 가는 여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룻다와 욥바에는 이미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1절을 보면 “믿는 이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방문하기 위해 갔다”고 합니다. 베드로가 처음 이 지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간 것이 아니라 이미 믿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언제 믿게 되었을까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스데반 순교 사건 이후 흩어진 이들이 룻다와 욥바로 흩어져 있을 수 있고, 오순절 성령 강림 때 그들이 모였다가 성령을 체험하고, 복음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간 이들이라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로 인하여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 같지만, 언제나 하나님이 앞서 행하시는 것을 우리가 따라가는 것뿐입니다.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고치셨다!
베드로가 여러 지역을 다니며 룻다에 사는 성도들을 방문했습니다. 믿음을 격려하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2차 전도 여행을 갈 때 1차 전도 여행에서 갔던 지역을 다시 방문해서 그때 예수 믿었던 이들을 격려하고 새로운 지역으로 갔습니다. 3차 전도 여행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언제나 복음을 한 번 전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계속적인 방문과 격려를 통해서 그들의 믿음을 강건하게 세우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사역 가운데 예수님이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어떤 기적을 일으키려고 이 지역을 여행한 게 아니라 성도들을 격려하려고 방문했는데, 그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룻다에서 베드로는 중풍에 걸려 8년 동안 침대에 누워 있던 ‘애니아’라는 사람을 고쳤습니다. 베드로가 그에게 매우 직설적으로 명령합니다. “애니아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대를 고치실 것이오. 일어나 자리를 정돈하시오.” 이 간단한 선포에 애니아가 일어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첫째, 베드로는 자신이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고치시는 것임을 분명히 선포합니다. 베드로가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병자를 만나는 순간 살아계신 예수님이 그에게 하신 “병자를 고치라”는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순종하고 담대하게 선포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병자를 고쳐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시도한 것이 아닙니다. 병자의 요청도 없었습니다. 부활해서 살아계시고, 성령 안에 임재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온 담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애니아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고치실 것이오”라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을 때, 말씀을 선포하고 순종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돌아온다!  
둘째, 예수님이 고치신 것인지 아닌지는 그 결과가 말해줍니다. 그 결과 사람들이 예수님께 돌아오는지를 통해 확인됩니다. 베드로가 룻다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고치실 것이오”라고 말했을 때 애니아에게 예수님에 관한 정보나 소식이 있었기에 믿음으로 반응하고, 믿음으로 합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전혀 소식을 몰랐다면 당황했을 뿐이고, ‘그가 누구인데 나를 고치냐?’고 반응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아주 작은 지식이라도 들어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이 부활하셨고, 부활하신 그분을 증거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대를 낫게 하실 것이오”라고 했을 때 애니아의 마음에 믿음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많은 사람에게 예수님의 소식을 전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언제 강력하게 역사하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모든 내용이 하나님이 쓰시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몰랐던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성경 지식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단어를 못들은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정보로서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도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어느 정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믿음으로 연결되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지식이 애니아에게서 일어난 일 것처럼,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지식을 전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가 고침 받음으로 인하여 베드로가 영광을 받고, 베드로를 사람들이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 많은 사람이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라면 반드시 사람들이 예수님께 돌아옵니다. 
큰 은혜를 체험하며 구원을 받다!
셋째, 애니아는 큰 병에 걸렸었습니다. 당시 중풍은 완전한 불치병이었는데, 큰 은혜를 체험하며 구원을 받았습니다. 큰 병이 없는 한 기적적인 치료의 은혜를 받을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 성도들 가운데도 큰 병에 걸리신 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죄의 병에 걸린 이들을 고치기 위해 오신 의사입니다. 깊이 병들어 있는 죄, 누구도 깊은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육체는 건강할지라도 교만이라는 큰 영적 질병에 걸리지 않습니까? 그러나 완전히 마비된 것 같은 죄의 병에 걸렸을지라도 예수님이 고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계셨을 때와 마찬가지로 하늘에 계실지라도 동일한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땅에 계실 때 중풍병자를 고치셨던 것처럼, 하나님 우편에 계신 상태에서도 병자를 고치실 수 있습니다. 
필요한 것은 ‘단순한 믿음’
넷째, 애니아가 고침을 받을 때 필요했던 것은 단순한 믿음뿐입니다. 고침을 받고 구원을 받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준비해야 할 것도 없습니다. 그저 단순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로마서> 10장 8~9절에서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현재 있는 모습 그대로 그리스도가 구원자이심을 단순하게 믿으면 됩니다. 애니아가 그 믿음의 증거로 일어났습니다. 단순한 믿음으로 고침을 받고 구원을 받은 애니아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단순하게 믿고, 받아들일 때 죄의 질병이 치유되고, 때로 육신의 질병도 치유를 받습니다. 
욥바에서 일어난 더 큰 기적
룻다에서 기적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욥바의 제자들에게도 전해졌습니다. 그런데 욥바에서는 더 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곳에 ‘다비다’라고 불리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다비다는 셈족인 아람어 계통이고, 그리스식으로는 ‘도르가’라고 불리는 여제자입니다. 사울로도 불리고, 바울로도 불리는 것과 같습니다. 왜 ‘도르가’라는 이름을 기록했을까요? <사도행전> 첫 독자가 데오빌로라는 이방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람어뿐만 아니라 그리스식 이름도 함께 기록한 것입니다. 두 이름 모두 ‘영양’이라는 동물을 의미합니다. 다비다는 신실하고 선한 제자였습니다. 36절을 보면 “그녀는 언제나 선한 일을 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습니다”라고 합니다. 39절에서는 “모든 과부들이 베드로를 둘러서서 울며 다비다가 살아 있을 때 만든 속옷과 겉옷을 보여 주었습니다”라고 합니다. 다비다가 속옷과 겉옷을 직접 만들어서 가난한 과부들을 돕는 선행을 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또한 성령의 열매와 은사입니다. 눈에 띄지는 않지만,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기쁘게 섬기는 것이 성령 받은 성도들의 삶입니다. 그런데 선한 여제자가 죽었으니 얼마나 슬펐겠습니까? 특히 다비다의 도움을 받았던 많은 사람이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고 있고, 베드로에게 청했습니다. “다시 살려달라”고 청한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욥바의 선한 제자가 죽어서 너무 슬프니까 베드로를 초청한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태어날 때와 죽을 때가 정반대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태어날 때 우리 모두 엉엉 울면서 태어납니다. 그러나 주변의 모든 사람은 박수하며 기뻐합니다. 죽을 때도 태어날 때와 똑같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본인은 죽음이 두려워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고, 주변 사람들은 “잘 가시오. 속이 후련합니다”라면서 박수한다면 얼마나 잘못된 인생을 산 것일까요? 사람은 태어날 때와 죽을 때가 정반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죽을 때는 밝고 환한 모습으로, 천국에 입성하는 기쁨을 가지고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변 모든 사람은 어린아이처럼 펑펑 우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다비다가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다비다의 죽음 소식을 듣고 베드로가 왔을 때 시신을 다락방에 두었습니다. 장례를 치르는 절차에 이미 들어갔습니다. 베드로가 다락방에 가서 조문한 것이 아닙니다. 모두 방에서 내보냈습니다. 그리고 무릎 꿇고 기도했습니다. 베드로가 무릎을 꿇고 얼마 동안 기도했는지는 모르지만, 무슨 기도를 했는지는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틀림없이 베드로는 예수님께 이 상황에서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물었을 것입니다. 다비다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슬픔에 빠진 제자들을 위로하며 마무리해야 하는지, 아니면 다비다의 죽음을 통해 예수님이 행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는지를 묻는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룻다에서는 그런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애니아를 고칠 때는 무릎 꿇고 기도하는 장면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미 예수님으로부터 어떤 음성과 확신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시간이 필요 없이 “애니아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고치실 것이오”라고 선포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욥바에서는 이미 주어진 예수님의 계시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두 내보내고 무릎 꿇고 기도하면서 예수님의 뜻을 묻는 시간을 가진 것입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모든 병자를 고치지 않았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그는 모든 상황에서 고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고치라”고 하실 때만 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왜 모든 사람을 내보냈을까요? 틀림없이 베드로는 예수님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에 죽음에서 다시 살리시는 기적을 세 번 행하셨는데, 베드로가 모두 목격했습니다. 베드로는 기도 가운데 예수님이 행하셨던 일들을 다시 기억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사람들을 모두 방에서 내보낸 것은 예수님이 야이로의 딸을 다시 살리실 때와 똑같은 행동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곡하는 자들을 모두 내보내시고 기도하시는 것을 연상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처럼 사람들을 방에서 모두 내보내고 기도했습니다. 방해받지 않고 하나님과 단둘이 기도함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방향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시신을 향해 몸을 돌려 명령합니다. “다비다야, 일어나거라.” 예수님이 야이로의 딸을 고치실 때는 “소녀야, 일어나라”(달리다쿰)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그 소녀가 일어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이 기적 또한 예수님이 앞서 행하셨던 나사로를 살리시고,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기적과 같이 진정한 부활은 아닙니다. 진정한 부활이라면 다시 살아난 이가 예수님처럼 지금도 살아 있어야 합니다. 일시적인 소생입니다. 잠깐의 회복입니다. 그러나 다시 죽었기 때문입니다. 일시적인 소생을 통해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은 기적의 결과로 많은 믿지 않는 이들이 믿도록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역사에 나타난 모든 기적은 시대마다 목적이 있습니다. 모세 시대에는 살아계신 유일한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종임을 확신시켜 주시기 위해 많은 기적이 필요했습니다. 예언자들의 시대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택하신 민족임을 보여주시고, 그 민족을 통해 일어나는 일이 하나님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적들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도들의 시대에는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셨음이 사실이며, 부활하신 예수님이 지금도 살아계심을 믿도록 하려고 기적을 허락하셨습니다. 이 시대에도 하나님이 놀라운 치유의 기적을 허락하신다면 단 한 가지 이유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많은 믿지 않는 이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려고 하나님이 놀라운 기적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죄인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기적
여러분, 어떤 큰 문제, 큰 질병 가운데 있습니까? 기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하나님, 이 질병이 낫는 기적을 통해 주변에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믿게 하옵소서”, “내가 장수하게 해달라는 차원이 아니라 기적을 통해 주변에 예수님을 믿는 역사가 일어나게 해주십시오”라는 기도의 제목이라면 하나님이 응답하시리라 믿습니다. 
룻다와 욥바에서 병자가 나음을 얻고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것보다 큰 기적이 무엇입니까? 죄인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기적입니다. 욥바의 다비다는 다시 살아났지만 결국 죽었습니다. 일시적인 회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죄인 된 이들이 생명을 받게 되는 것은 영원한 회복입니다. 완전한 부활입니다.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기적이 우리에게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더 큰 기적입니다. 치유의 기적은 마중물일 뿐입니다. 진정한 구원의 샘물이 터져 나오는 역사의 마중물일 뿐입니다. 베드로가 일으킨 기적의 결과가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으로 연결되었습니다. 더 중요한 기적을 일으키는 마중물 역할을 하는 게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님들의 질병이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그것을 통해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