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표상이 보호자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기독교 영성의 차원에서 이해하려면 두 가지 관점이 필요하오. 하나는 우리의 삶이 아버지를 절실하게 필요로 할 정도로 그 토대가 부실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사람에 따라서, 또는 상황에 따라서 생각이 다를 거요. 양쪽의 대답이 모두 가능하오. 어떤 사람은 잘난 척하면서 하나님을 믿지 말고 자기 주먹을 믿는다 하오. 액수가 늘어나는 저금통장과 주식, 그리고 부동산에 취미가 있는 현대인들은 주로 이런 생각을 많이 할 것이오. 어떤 사람은 매사를 불안하게 대하기도 하오. 소유가 늘어나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요. 양쪽 모두 삶을 풍요롭게 느끼는 것은 아니라오. 전자는 불안을 숨기는 것이며, 후자는 불안에 파묻혀 있는 것이오.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떤 방식으로도 아버지를 찾을 수 없소이다. 아버지 없는 고아들과 같소.
다른 하나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행위는 모두 선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오. 아버지는 자식에게 무조건 좋게 하오. 자식이 떡을 달라는데 돌을 주며, 고기를 달라는데 뱀을 줄 부모가 없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적도 있소. 아버지에게서 섭섭한 말을 들을 수도 있겠지만 결국은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 바로 아버지라는 존재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바로 여기에 근거하고 있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좋게 해 주시는 분이오. 탕자도 아버지의 그런 마음을 알기에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할 수 있었소. 이런 생각을 낭만적이거나 막연한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오. 그대는 시편을 가끔이라도 읽어보시오. 시편기자들은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경험했소. 완전히 외톨이가 되고 억울한 일로 밤새 한잠도 못잘 때도 있었소. 그래도 그들은 이렇게 노래를 불렀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면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도다.”(시 23편)
이런 기도와 찬송도 결국 일이 잘 풀린 탓이지 삶이 완전히 망가졌다면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시오? 우리가 살다보면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는 걸 부정하지는 않겠소.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은 상황이 우리의 일상에서 벌어지고 있소. 욥의 운명이 어디 픽션으로 끝나겠소. 여기서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는(롬 8:28) 바울의 진술을 굳이 끌어들이지 않겠소. 우리가 아직 어린애라서 아버지의 깊은 생각을 따라가지 못할 뿐이라는 당연한 말도 하지 않겠소. 실제적으로 설명하겠소. 나는 내일이라도 불치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병원에 가서 확진 받을 수도 있소. 사고로 큰 장애를 얻을 수도 있소. 내가 하던 모든 일들이 중단되오. 육체적인, 그리고 정신적인 고통이 엄습할 거요. 모든 주변으로부터 단절되는 상태를 우리는 못 견뎌하겠지만, 거기서 오히려 더 큰 생명의 환희를 느낄 수도 있다오. 야생화 하나를 보더라도 전혀 새롭게 다가온다오. 그런 경험이 없이 건강하고 오래 잘 사는 것만이 최고의 삶이 아니라는 걸 그대도 인정할 거요. 여기서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어떻게 영적으로 소통되고 있느냐 하는 것이오. 그것이 없다면 불행한 삶은 그대로 불행이 되고 마오.
한 마디만 덧붙이겠소.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식하고 경험한다면 이제 생리적인 아버지와의 관계도 새로워질 거요. 생리적인 아버지는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지 못하오. 그도 역시 보호자가 필요한 사람에 불과하기 때문이오. 아들과 아버지가, 딸과 어머니가, 할아버지와 손자가 모두 함께 하나님만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소이다. (2010년 7월29일, 목, 낮은 구름, 높은 구름, 시원한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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