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사회에서 실제적인 형제 공동체는 불가능한 거요? 어제 묵상에서 나는 형제 공동체가 일반적인 게 아니라고 말했소. 엄격하게 말하면 형제 사이에도 경쟁심이 작동할 때가 많소. 가장 두르러진 예를 카인과 아벨 이야기에서 확인할 수 있소. 카인은 시기심으로 동생 아벨을 들로 데리고 나가 돌로 쳐 죽였소. 형제끼리도 경쟁의식이 잠재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오.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론에 따르면 아들이 무의식적으로 아버지를 연적으로 느낀다고 하니, 더 긴말이 어디 필요하겠소. 수도원이나 수녀원도 완벽한 형제, 자매 공동체를 유지할 수 없을 거요. 다만 수도원의 제도와 개인의 영적 훈련이 그것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 아버지여!’라고 기도할 능력이 없는 존재들이오. 능력이 없는데도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위선 아니겠소? 우리의 영적인 상태를 조금 더 정직하게 들여다보시오. 이것은 그대에게 선생 연하면서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을 포함하고 하는 말이오. 우리가 예배를 드리거나 기도할 때 형제를 향해서 마음을 열고 있는지를 보면 되오. 말은 교언영색으로 쏟아낼 수 있소. 그런 말이 마음까지 그대로 담아내는 것은 아니라오. 한국교회의 기도가 얼마나 이기적인 것에 매여 있는지를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을 거요. 북한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들도 많소. 그러나 북한 사람들을 형제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드무오. 북한이 변화시키려는 열정이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곧 형제 관계와 일치시킬 수는 없소. 형제 관계는 대등 관계요.
우리에게 ‘우리 아버지여!’라고 기도할 능력이나 자격이 없다면, 이제 어떻게 하면 되는 거요?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우리가 포기할 수는 없소. 포기해서도 안 되오. 여기서는 일단 실제로 형제 관계의 삶으로 들어가는 경건훈련이 필요하오. 주기도는 단순히 기도의 한 형태가 아니오. 기도 프로그램이 아니오. 그것은 삶 자체요. 그렇소. 기도는 삶 자체요. 삶이 곧 기도이기도 하오. 삶 말고 더 진정한 기도가 어디 있겠소? 한 끼의 식사를 대하는 삶의 태도, 한 모금의 공기와 물을 대하는 삶의 태도, 모든 살아 있는 것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삶의 태도야말로 가장 생생한 기도요.
조금 옆으로 나가는 말을 해도 이해하시오. 오늘 한국교회의 기도는 과잉이요. 하나님을 귀찮게 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요. 기도를 양적으로 너무 많이 드린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오. 기도가 일종의 프로그램이 되었다는 말이오. 온갖 종류의 기도 형식들이 끊임없이 개발되고 있소. 나도 젊었을 때 학생들이나 청년들과 기도원에 가서 여러 종류의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가르치기도 했소. 어떤 교회는 24시간, 일 년 12달 교회당에서 기도 소리를 끊기지 않는 이벤트를 실시하기도 하오. 100일 새벽 기도회에 출석 체크도 한다는구려. 여러 형태의 기도를 드린다는 것 자체를 내가 뭐라 하는 건 아니오. 그런 기도의 열정에 비해서 삶의 영성이 너무 빈곤하다는 것이오. 방법론은 결국 진리를 해치는 거요. 기도도 다양하고 재미있게 하고 삶에도 충실하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 사람들도 있을 거요. 그게 잘 안 된다오. 왜 그런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오. 소유와 존재는 다른 차원이라오. 소유의 차원에 머문 사람은 존재의 차원에 들어갈 수 없고, 존재의 차원에 들어간 사람은 소유의 차원이 시들하게 보인다오.
오해는 마시구려. ‘우리 아버지!’라는 기도를 구체적으로 드리지 않아도 좋다는 뜻은 아니었소. 삶으로는 따라갈 생각을 하지 않고 그저 기도 프로그램에 치우는 잘못을 지적한 것뿐이오. 기도와 삶은 동시적인 사건이오.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하는 것과 세상에서 형제 관계의 삶을 복원하는 것은 동시적인 사건이면서 서로 변증법적으로 연관된 사건이오. 기도는 삶을 내용으로 삼아야 하고, 삶은 기도의 연장선으로 생각해야 하오. 수도사들이 육체노동과 말씀(기도)을 구도의 두 기둥으로 삼는 것과 같소. (2010년 7월26일, 월, 높고 낮은 구름, 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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