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라어 성경은 주기도를 이렇게 시작하오. “파테르 헤몬 호 엔 토이스 우라노이스” 첫 단어가 ‘파테르’인데, 아버지라는 뜻이오. 이어서 ‘우리의’라는 인칭대명사가 나온다오. 독일어로 주기도를 Vaterunser(파터운저)라고 하오. 헬라어로 된 주기도 첫 단어를 독일어로 바꾼 것이오. 여기서 아버지는 무슨 의미겠소?
여성신학자들은 아버지라는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소. 아버지라는 단어는 남성이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오. 그대는 하나님을 남성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고정관념에 젖은 사람은 아닐 거라고 믿소. 기독교 남성중심주의는 뿌리가 깊긴 하오. 어거스틴 같은 위대한 신학자요 영성가도 여성을 폄하했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소. 어거스틴의 말을 들어보시오.
남자는 하느님의 형상을 갖고 있으므로 머리를 가려서는 안 되지만 여자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머리를 가리도록 명령을 받았다는 사실을 사도들은 우리들에게 어떻게 말했는가? 그것은 그야말로 내가 인간 정신의 본성을 다룰 때 이미 말했던 것과 같은 것이다. 즉 여자는 그녀 자신의 남편과 함께 있을 때 하느님의 형상인 것이며, 따라서 그 모두가 하나의 형상으로 될 수 있는 것이지만 여자가 그녀의 특성 속에서 단독적인 배우자로서 별도로 언급될 때에는 그녀는 하느님의 형상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남자는 단독적으로 언급될 때도 여자와 하나가 되어 결합되어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완전하게 하느님의 형상인 것이다. (De Trinitate 7, 7, 10)
루터의 말도 인용하겠소.
이러한 처벌 역시 원죄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여자는 그녀의 육체에 지워진 불편과 고통들을 참아내듯이 마지못해 처벌을 참아내고 있다. 규칙은 남편의 수중에 있으며 아내는 하느님의 명령에 의해 남편에게 복종해야만 한다. 그는 가정과 국가를 통치하고 전쟁을 수행하며 그의 소유물을 방어하고 땅을 일구고 집을 짓고 식량을 재배하는 등등의 일을 한다. 반면에 여자는 벽에 박혀 있는 하나의 못과 같다. 그녀는 집에서 앉아 지낸다. ... 아내는 바깥일이나 혹은 국가의 일에 관련된 일들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박탈당한 사람으로서 집에서 가정 일을 돌본다. ... 이런 식으로 이브는 벌을 받고 있는 것이다.(M. Luther, Lectures on Genesis, Gen. 2:18, 1958, p.115)
지나가는 길에 어거스틴과 루터를 한 마디 거들겠소. 우선 어떤 위대한 신학자도 모든 부분에서 완벽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오. 어거스틴과 루터도 시대의 아들들이었기에 시대정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소. 더 거슬러 올라가면 바울도 마찬가지였소. 바울도 여성들이 예배드릴 때 머리를 수건으로 가리라고 했소. 교회에서 여성들이 지도자로 나서지 말라는 말도 했소. 어거스틴과 루터의 여성에 대한 발언을 근거로 그들의 신학 전체를 매도한 것은 지나친 처사요. 또한 그들이 여성에 대해서 언급할 때 무엇을 말하려고 있는지를 먼저 살펴야 하오. 여성 자체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주제를 말하려는 것이오. 인간의 죄와 구원, 또는 교회와 사회의 관계 등을 말하려는 것이오. 내가 이들을 발언을 비호하려는 게 아니오. 지난 기독교 역사에서 여성차별적인 요소가 강했다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소. 그 시작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본 것에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살만 하오.
하나님을 ‘어머니’라고 부르는 건 어떻겠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어머니여!”라고 말이오. 실제로 이런 식으로 바꿔 기도하는 여성 신학자들도 있소. 그게 크게 잘못은 아니오. 하나님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남성은 아니라오.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속성에도 아버지 상만이 아니라 어머니 상도 있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부를 때 어머니를 꼭 끼어 넣어야 하는 건 아닐 거요. 그런 방식이라면 성서와 사도신경을 비롯한 모든 신조에 나오는 남성 중심적인 표현들이나 고대 물리적 표상들을 모두 바꿔야 하오. 바꾸는 과정에서 본질적인 부분까지 훼손될 가능성이 높소. 그렇게 하기보다는 본래의 뜻을 바르게 공부하는 것이 훨씬 지혜로운 게 아니겠소?
주기도의 아버지 호칭은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을 창조하셨으며, 지금도 보호하신다는 뜻을 담고 있소. 어린아이들에게 아버지 표상은 절대적인 보호자요. 아버지 품에 안겨 있으면 두려울 게 없소. 주기도는 아버지 표상을 잠시 빌려서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전하려는 것뿐이오. 하나님은 우리 생명의 주인이며, 보호자라고 말이오. 이런 사실을 실질적으로 깨닫고 살아갈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다른 차원에 들어갈 수 있을 거요. 하나님을 막연한 대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보호자로 인식하고 경험한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소? 그게 실제로 가능하다고 보오? 여기에 기독교 신앙의 알짬이 들어 있으니 오늘 밤 깊이 생각해 보시구려.(2010년 7월28일, 수, 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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