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저자는 카메라의 앵글을 야곱의 집으로 돌립니다. 칠 년 동안의 기근은 가나안 땅까지 덥쳤습니다. 견디다 못한 야곱은 이집트에 곡식이 풍성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막내 베냐민을 제외한 열 명의 아들들을 이집트로 내려 보냅니다(1-5절).
이집트에 도착한 형들은 이집트의 총리가 된 요셉을 마주하게 됩니다(6절). 요셉은 그들을 알아 보았지만,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시간적으로 이십 년이나 지났고 요셉이 화려한 이집트 총리의 관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압도하고 있던 두려움도 동생을 알아보지 못하게 한 원인이었을 것입니다(7-8절). 요셉은 자신 앞에 업드려 있는 형들을 보면서 어릴 때 꾼 꿈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 때 요셉은 전율을 느꼈을 것입니다. 자신이 의도한 것도 아닌데 그 꿈이 이십 년 후에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 앞에서 신비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의 마음 상태를 알아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첩자로 몰아 세웁니다(9절). 형들은 자신들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설명합니다. 요셉은 곧이듣지 않는 척하면서 결백을 증명할 방법을 제시합니다. 아홉 형제를 인질로 잡아 두고 있을 테니 한 사람이 가서 막내 동생을 데려 오라는 것입니다(10-16절). 형들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요셉은 그들을 감옥에 가두어 둡니다(17절). 그렇게 함으로써 요셉은 자신을 죽이려 했고 노예로 팔아 넘긴 일에 대해 형들이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를 알아 보려 했던 것입니다.
사흘 후에 요셉은 형들을 끌어 내어 한 사람만 인질로 이집트에 남아 있고 나머지 형제들은 곡식을 가지고 가서 식구들을 살린 다음 막내 동생을 데리고 오라고 명령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질로 잡혀 있는 형제가 죽음을 당할 것이라고 했습니다(18-20절). 형들은 그 제안을 따르겠다고 답한 다음, 요셉이 알아듣지 못하는 줄 알고 과거에 요셉에게 행한 일에 대해 말하며 후회를 합니다(21-22절). 큰 형 르우벤이 동생들의 잘못을 책망합니다. 그는 동생들 몰래 요셉을 살려 내려 했었습니다(23절).
요셉은 그제서야 맏형 르우벤이 자신을 살릴 마음으로 자신을 구덩이에 넣자고 제안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말을 듣고 요셉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으로 가서 울음을 쏟아 놓습니다(24절). 형들의 진실한 뉘우침 그리고 르우벤 형의 진심을 알고는 그의 마음에 뭉쳐 있던 분노가 녹아 내린 것입니다. 그 눈물에는 수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을 것입니다.
감정을 추스린 다음 요셉은 형들에게 다시 와서 시므온을 인질로 잡아 두고 다른 형들에게 원하는 대로 곡식을 제공해 줍니다(24-25절). 요셉은 종들을 시켜 받은 돈을 곡식 자루에 넣어 보내게 합니다. 그들이 그 사실을 안 것은 하룻길을 간 다음의 일입니다(26-28절). 그들은 두려움에 질려 집으로 돌아가 야곱에게 자초지종을 다 말씀 드립니다(29-34절). 그런 다음 곡식 자루를 풀어 보니 자루마다 그들이 지불한 돈이 들어 있는 겁니다(35절).
그들은 영락없이 함정에 빠졌고 첩자의 누명을 벗을 길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야곱은 요셉에 이어 시므온도 잃어 버렸다고 슬퍼합니다(36절). 야곱은, 베냐민을 절대로 이집트로 데려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르우벤이 두 아들의 목숨을 걸면서 베냐민을 꼭 다시 데려 오겠다고 약속합니다(37절). 하지만 야곱은 완강하게 거절합니다(38절).
묵상:
요셉은 이십여 년 동안 형들에 대한 분노를 마음에 품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가 인생의 바닥에서 만난 하나님을 통해 그 분노를 어느 정도 치유 받았을 것입니다. 이집트에 팔려 온 이후의 요셉의 태도와 모습을 보면 그는 분노에 사로잡힌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도 인간인지라 자신을 죽이려 했고 결국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에 대한 감정의 앙금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형들에게 애증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치유하실 분노의 분량이 따로 있고, 형들과의 화해를 통해 치유할 분노의 분량이 따로 있었던 것입니다.
형들이 자신에게 행한 일에 대해 뉘우치는 말을 들었을 때 그리고 자신을 구덩이에 넣어 굶어 죽게 하자고 제안했던 르우벤의 진심을 알았을 때, 요셉에게 남겨져 있던 분노의 앙금에 동요가 생겨났습니다. 때로 우리는 사정을 다 알지 못하고 우리 식으로 해석하여 오해를 하고 분노를 품곤 합니다. 요셉은 참을 수 없어서 아무도 보지 않는 곳으로 가서 통곡을 합니다. 눈물과 함꼐 그 안에 남아 있던 분노의 앙금이 녹아 내렸을 것입니다.
한참 울고 났을 때, 요셉은 납덩이처럼 늘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것이 사라지는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그 응어리가 모두 풀리는 데에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더 많은 눈물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얽히고 설킨 인간 관계에서 분노를 느끼는 것은 때로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문제는 분노를 품고 사는 데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숨통을 조이는 일입니다. 자신을 과거의 시간에 묶어 놓는 일입니다. 용서는 스스로 조이고 있는 숨통을 풀어 주는 일이며,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발목을 잡고 있는 손을 풀어내는 일입니다. 그것은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첫 걸음을 떼는 것이 중요합니다.
'좋은 말씀 > -사귐의 소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람을 고쳐 쓰시는 하나님 (창세기 44장) / 김영봉목사 (0) | 2024.06.25 |
---|---|
용서와 화해 (창세기 43장) / 김영봉목사 (0) | 2024.06.23 |
믿는 사람의 존재 가치(창세기 41장) / 김영봉목사 (0) | 2024.06.21 |
은밀하게 행하시는 하나님 (창세기 40장) / 김영봉목사 (0) | 2024.06.20 |
믿음, 일관된 신실함 (창세기 39장) / 김영봉목사 (0) | 2024.06.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