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요셉이 간수장에게 신임을 받아 경호대장의 감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을 때, 이집트 왕의 두 신하가 투옥 당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는 바로가 먹을 빵을 관장하는 사람이었고, 다른 하나는 술을 책임진 사람이었습니다(1-3절). 당시에는 최고 권력자들에 대한 암살 시도가 빈번했기 때문에 임금의 음식을 책임 맡은 사람은 임금의 총애를 받는 사람들 중에 선택되었습니다. 두 관리가 투옥된 이유는 바로에 대한 암살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혐의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경호대장은 요셉을 시켜서 두 관리를 섬기게 했습니다(4절). 보디발이 요셉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거두지는 않았음을 여기서 확인합니다.
얼마 후, 두 관리가 같은 날 꿈을 꿉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모든 꿈에 의미가 있다고 믿었고, 꿈 해몽을 훈련하는 학교도 있었습니다. 감옥에 갇히기 전에 두 관리는 꿈을 꿀 때마다 해몽가를 찾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범상치 않은 꿈을 꾸었는데 해몽 해줄 사람이 없어서 시무룩 해 있었습니다(5-6절). 요셉이 낌새를 알아 차리고 무슨 일이냐고 묻습니다(7절). 그들은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해몽해 줄 사람이 없어서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요셉은 “해몽은, 하나님의 하시는 것이 아닙니까?”(8절)라고 답하며 자신에게 말해 달라고 합니다. 꿈의 의미를 풀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영감을 주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술 맡은 관리가 자신의 꿈을 이야기 해줍니다(9-11절). 요셉이 그 이야기를 듣는 중에 하나님께서 영감을 주십니다. 요셉은 사흘 후에 암살 누명을 벗고 복권될 것이라는 의미라고 풀어 줍니다(12-13절). 요셉은 복권되면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합니다(14-15절). 빵 맡은 관리가 요셉의 해몽을 듣고 솔깃하여 자신의 꿈을 이야기 해줍니다(16-17절). 요셉은 그가 사흘 후에 암살 혐의로 처형을 당할 것이라는 뜻이라고 해명해 줍니다(18-19절).
사흘 후, 바로는 생일 잔치를 벌이고는 두 관리를 감옥에서 불러내어 술 맡은 관리는 복직시키고 빵 맡은 관리는 처형합니다(20-22절). 그러나 복권된 관리는 요셉의 청을 까맣게 잊어 버립니다(23절). 저자는 “기억하지 못하였다”고 말한 다음 “요셉을 잊고 있었다”고 재차 강조합니다.
묵상: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가끔, 아주 가끔 획기적이고 극적입니다. 하지만 더 많은 경우, 아니 절대 다수의 경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점진적이고 느리며 잘 감지되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시간표에 맞추어 행동 하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그분의 계획과 시간표와 속도를 따라 일을 행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우리에게는 느려 보이고 답답해 보이며 때로는 무심해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우리 자신의 힘으로, 우리 자신이 원하는 속도로, 우리 자신이 바라는 방식으로 일을 만들어 내려 합니다. 그렇게 하면 더 빨리, 더 크게, 더 좋게 일이 될 것 같이 생각합니다. 하지만 결과는 그 반대입니다. 일은 계획대로 되지 않고 우리 자신은 제 풀에 지쳐 버립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요셉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은 너무도 느렸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그를 잊으신 것 같습니다. 그의 누명을 벗기고 감옥에서 끌어낼 계획이 하나님께는 없는 것 같았습니다. 술 맡은 관리가 복권 될 때 요셉은 ‘드디어 때가 왔구나!’ 싶었을 것입니다만, 술 맡은 관리는 요셉을 까맣게 잊었습니다. 그로서는 감옥에 있었던 시간을 되돌아 보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로 인해 요셉은 여전히 “구덩이 감옥”(15절)에 머물러 있어야 했습니다. 저자가 23절에서 술 맡은 관리가 요셉을 기억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두 번이나 강조한 것은 하나님에게 완전히 잊혀진 것 같았던 요셉의 상황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믿음의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하나님의 느린 걸음 걸이에 익숙해지는 것이고, 그분의 미세한 음성에 예민해지는 것이며, 없는 듯이 일하시는 그분의 손길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하시는 일을 믿고 그분의 시간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매일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성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의 성실은 성공에 이르는 가장 분명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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