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귐의 소리

역사를 빚어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창세기 38장) / 김영봉목사

새벽지기1 2024. 6. 18. 05:56

해설:

저자는 요셉의 이야기를 잠시 멈추고 유다가 겪은 이야기 하나를 소개합니다. 유다는 다른 형제들이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살았고 가나안 여인과 결혼 합니다(1-2절). 그는 아들 셋을 두었는데, 큰 아들이 다말이라는 여인과 결혼을 합니다(3-6절). 큰 아들은 자녀를 남기지 못한 채 일찍 세상을 떠납니다. 그 대목에서 저자는 “유다의 맏아들 에르가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하므로, 주님께서 그를 죽게 하셨다”(7절)고 기록합니다. 무슨 악을 행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유다는 당시의 풍습대로 둘째 아들에게 형수 다말이 아들을 낳을 수 있게 하라고 권합니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홀로된 여성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자식들 뿐이었기 때문에 그런 풍습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둘째 아들 오난은 아들을 낳아도 자신의 아들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임신이 되지 않게 합니다(8-9절). 저자는, 그것이 “주님 보시기에 악하므로”(10절) 그를 죽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유다는 두 아들이 연거푸 이른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고 다말에게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과거에도 남편에게 문제가 생기면 며느리에게 그 책임을 뒤집어 씌우곤 했습니다. 남편이 일찍 죽으면 “남편 잡아 먹는 여자”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습니다. 유다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는 셋째 아들이 아직 결혼할 만한 나이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을 핑계로 삼습니다. 그는 다말에게, 친정에 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막내 아들이 장성한 다음에 오라고 이릅니다(11절). 그 기간 동안 다말은 상복을 입고 지내야 했습니다. 출가한 여인으로서는 가장 수치스러운 일을 당한 것입니다.

 

그로부터 수년이 지납니다. 그 사이에 막내 아들은 결혼할 나이가 되었지만, 유다는 다말을 부르지 않습니다. 다말을 불렀다가는 막내 아들까지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 즈음에 유다의 아내가 세상을 떠납니다. 그는 아내를 위한 애도를 서둘러 끝내고 친구와 함께 양털을 깎으러 딤나로 올라갑니다(12절). 유목민들에게 양털을 깎는 날은 농부에게 추수하는 날과 같습니다. 

 

한편 다말은 시아버지가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을 알고는 분노합니다. 그러던 차에 유다가 양털을 깎으러 자신이 사는 마을 근처로 온다는 소문을 듣습니다. 그는 성매매 여성으로 변장한 후에 유다가 지나가는 길목에서 기다립니다(13-14절). 아내의 애도 기간을 서둘러 끝낸 유다는 정욕을 채워줄 상대를 찾을 것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다말의 계획은 정확히 맞아 들어갑니다. 유다는 그가 누구인지 모른채 다말에게 접근합니다(15절). “너에게 잠시 들렀다 가마, 자, 들어가자”(16절)는 말에서 유다의 충동적인 태도가 엿보입니다. 다말은 유다에게 흥정을 한 후(17절)에 담보로서 “도장과 허리끈과 지팡이”(18절)를 맡기라고 요구합니다. 그렇게 시아버지와 동침한 후에 다말은 다시 집으로 돌아와 과부의 옷을 입고 기다립니다(19절).  

 

잔치에서 돌아온 유다는 친구를 통해 딤나에서 만난 창녀에게 화대를 전하고 담보물을 찾아 오게 합니다. 하지만 그 창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알아 보니, 딤나에는 창녀가 없다고 했습니다. 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이상 자신에게는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고 잊어 버립니다(20-23절). 

 

삼 개월 쯤 지났을 때, 다말이 성매매를 하여 임신했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다말이 일부러 그 소문을 퍼뜨렸을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듣고 유다는 격분하여 다말을 불태워 죽이라고 명령합니다(24절). 며느리는 법적으로 시아버지의 소유이니, 그 처분은 시아버지에게 달려 있습니다. 다말은 받아 두었던 담보물을 유다에게 돌려 보내면서, 아이의 아버지는 그 담보물의 주인이라고 알립니다(25절). 유다는 그 물건을 알아보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다말을 집으로 데려 옵니다(26절). 그는 더 이상 며느리를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달이 차서 해산을 해 보니 쌍둥이였습니다(27-30절). 

 

묵상:

성경은 정직한 책입니다. 인간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들이 다 들어 있습니다. 유다와 다말 사이에서 일어난 일들은 인간이 얼마나 타락할 수 있는지, 그리고 타락의 결과로 얼마나 추하고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적나라 하게 보여 줍니다. 유다에게 일어난 일 혹은 유다가 행한 일 중에 칭찬 받을만한 일들도 적지 않았을 터인데, 왜 굳이 이토록 수치스러운 일을 기록해 놓았을까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 우리는 성경을 더욱 신뢰하게 됩니다. 성경은 등장인물들을 미화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일어난 일 그대로 적어 놓습니다. 아니, 미담보다는 부끄러운 이야기들을 더 많이 기록합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합니다. 하나는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타락할 수 있는지를 봅니다. 유다는 요셉을 죽게 하느니 돈이라도 벌자고 제안했던 사람입니다. 저자는 에르와 오난의 죽음을 보도하면서 유다의 반응에 대해 침묵합니다. 요셉의 죽음을 두고 위로를 마다하고 슬퍼했던 야곱과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유다는 두 아들의 죽음의 원인을 다말에게 뒤집어 씌웁니다. 또한 아내를 잃고 나서 그는 서둘러 애도를 끝내고 정욕을 채울 상대를 찾습니다. 자신이 성매매 여인을 찾은 것은 문제 없다고 생각하고 며느리가 성매매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화형을 명했습니다. 

 

유다는 속속들이 죄악에 물든 인간형을 보여 줍니다. 그는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누구든 그렇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유다의 이야기를 읽으며 자신 안에 얼마나 무서운 죄악의 뿌리가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과 그런 이야기들을 엮어 당신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악의 화신과 같은 유다가 야곱의 열 두 아들 중에서 맏아들의 역할을 맡게 됩니다(49:8-12). 다말의 사건을 통해 그는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이야기에서 다시 등장한 유다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말하고 행동합니다(44장). 유다의 후손은 다윗 왕에 이르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릅니다. 그래서 다말이 유다에게서 얻은 아들 베레스는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마 1:3). 

 

메시아의 가계에 이렇게 수치스러운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동시에 깊은 위로와 소망을 안겨 줍니다. 때로 우리가 저지를 수 있고 또한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부끄러운 일들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구원 역사를 만들어 가는 씨줄과 날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큰 위로가 됩니다. 한때 아무리 극악무도한 악인이었다 해도 새로운 존재로 빚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봅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 놓고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따라 살아가자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대로 거룩한 삶을 살도록 힘써야 합니다. 하지만 때로 넘어지고 쓰러질 때조차 하나님의 손길에 의지하고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결국 모든 것을 합하여 선을 이루어 내실 것입니다(롬 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