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귐의 소리

믿음, 일관된 신실함 (창세기 39장) / 김영봉목사

새벽지기1 2024. 6. 19. 06:09

해설:

이야기는 다시 요셉에게로 돌아갑니다. 이집트로 끌려 간 요셉은 바로의 경호대장 보디발에 집에 노예로 팝려 갑니다(1절). 여기서 저자는 “주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셔서, 앞길이 잘 열리도록 그를 돌보셨다”(2절)고 적습니다. 그것은 보디발에게도 느껴질만큼 분명한 일이었습니다(3절). 그는 요셉에게 무엇인가 특별한 것이 있음을 알고 그를 신뢰하게 되었고 점점 더 많은 일들을 맡깁니다(4-5절). 일을 맡기는 것마다 잘 되는 것을 확인한 보디발은 마침내 자신의 음식을 관리하는 일 이외에 모든 일을 요셉에게 맡깁니다(6절). 임금이나 고관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음식을 관리하는 일이었습니다. 음식에 독을 타는 것이 가장 흔한 암살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즈음에서 저자는 요셉이 “용모가 준수하고 잘생긴 미남이었다”(6절)는 사실을 밝힙니다. 그는 외모도 뛰어났지만, 성실하고 근면한 생활 자세로 인해 더욱 멋지게 보였을 것입니다. 한편, 경호대장의 직무로 인해 남편이 장기 외출이 잦았기 때문에 보디발의 아내는 외롭게 지내는 날이 많았습니다. 그러던 차에 요셉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울만한 안전한 놀이개 감으로 보였습니다. 

 

부인의 도발과 유혹은 거침 없었습니다(7절). 하지만 요셉은, 그것이 주인의 신뢰를 배신하는 일이며 하나님에게 죄를 짓는 일이기에 응할 수 없다고 답합니다(8-9절). 어리석은 사람이라면 그 유혹을 받아들이는 것이 꿩 먹고 알 먹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에게는 육신적인 쾌락이나 물질적인 이득이 아니라 신의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그와 마주치지 않도록 노력합니다(10절).

 

그러던 어느 날, 집안에 아무도 없을 때 요셉이 부인과 마주칩니다(11절). 그는 요셉의 옷을 붙잡고 또 다시 유혹합니다. 그 실강이는 한참 지속되었을 것이빈다. 요셉은 마침내 부인의 손길을 뿌리치고 달아났고, 그 바람에 그의 옷이 보디발의 아내 손에 남게 되었습니다(12-13절). 거부 당한 애정은 증오로 변합니다. 부인은 밖에 나가 있던 종들을 불러 모아 요셉이 자신을 범하려 했다고 뒤집어 씌웁니다(14-15절). “이 히브리 녀석”(14절)이라고 말함으로써 이집트인 종들의 인종차별 정서를 자극합니다. 그들은 요셉의 주인의 총애를 받는 것에 대해 시기심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부인은 요셉의 옷을 침실에 두고 남편이 오기를 기다립니다(16절). 남편이 돌아오자 요셉의 옷을 보여 주면서 동일한 말로 모함합니다(17-18절). 새번역은 “당신이 데려다 놓은 저 히브리 사람이”(17절)라고 말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은 “당신이 데려다 놓은 저 히브리 종이”라고 번역해야 옳습니다. 요셉의 인종과 신분을 강조함으로써 남편의 분노를 자극하려 한 것입니다. 보디발의 입장에서는 요셉을 단칼에 처형할 수 있었습니다. 노예가 주인을 성폭행한 죄는 즉결처분에 해당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요셉을 왕의 죄수들을 가두는 감옥으로 보냅니다(20절). 아내의 말을 전적으로 믿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형들에게 죽을 뻔 했다가 살아나 노예로 팔려온 요셉에게 있어서 보디발의 총애와 신뢰는 인생 반전의 계기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감옥행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생의 의지를 놓아 버릴 만도 합니다. 그런데 요셉은 감옥에서도 여전히 신실하게 살아갑니다. 저자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면서 돌보아 주시고, 그를 한결같이 사랑하셨다”(21절)고 적습니다. 얼마 후에 간수장은 요셉을 신뢰하여 그에게 모든 것을 맡깁니다(22-23절).  

 

묵상:

저자는 요셉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하지만 그는 먼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삶의 목적은 성공과 번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에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편애를 등에 업고 천방지축이었던 철부지가 고난의 여정을 통해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입니다. 어떻게 이토록 다른 사람이 되었을까요? 

 

이집트로 끌려 와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 가기까지 시간적으로 얼마나 걸렸는지 모릅니다만, 그 기간 동안의 고난이 그를 변화시켰을 것이 틀림 없습니다. 그는 인생의 바닥에 내쳐지면서 많은 눈물로 후회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깊은 골짜기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이 이렇게 달라질 수가 없습니다. 고난의 골짜기를 지나면서 그는 오로지 하나님 안에서 그분의 뜻을 따라 사는 일에 인생을 걸었을 것입니다. 

 

그 결과, 그는 보디발의 집에서 신속하게 신뢰를 얻고 주인의 총애를 받습니다. 그러나 성공은 그의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목적은 성실이었습니다. 매일매일 하나님의 법도 안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며 사는 것이 그의 삶의 방법이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로부터의 집요한 유혹에도 끝내 흔들리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가 만일 빨리 성공하는 것을 목적 삼았다면, 그 유혹을 받아들였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성공을 위해 신의를 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보디발의 부인으로부터 모함을 받아 감옥에 던져지는 불행을 만났을 때, 그는 너무나 억울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지만, 이주민 노예로서의 신분 때문에 그는 어쩔 수 없이 그 불의를 참아야 했습니다. 그는 절망감에 자포자기 하고 앙심을 품고 인생을 저주하며 살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 자신을 추스르고 신실하게 살아갑니다. 그로 인해 그는 간수장의 마음에 들게 되었고, 신임과 신망을 받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저자는 그 이유에 대해 “주님께서 요셉을 돌보셔서, 그가 하는 일은 무엇이나 다 잘 되게 해주셨기 때문이다”(23절)라고 적습니다. 

 

이주민 노예였던 요셉에게 이집트의 사법제도는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소수자로서 요셉이 기댈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집트의 사법제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믿음의 대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그것이었습니다. 그는 인생의 깊은 나락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 그분의 정의를 믿고 의지하며 이 땅에서 신실하게 살아가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는 잘 되거나 못 되거나 상관하지 않고 하나님의 정의를 믿고 신실하게 살았습니다. 일관된 신실함, 그것이 믿음의 본질임을 다시 확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