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그랄 평원으로 밀려난 이삭이 그곳에서 자리를 잡고 번성합니다. 너무나 척박하여 그랄 사람들이 살지 않는 곳을 이삭은 풍요로운 땅으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여러 해가 지난 후, 아비멜렉이 부관들과 함께 그를 찾아옵니다(26절). 이삭은 그들에게 방문의 이유를 묻습니다(27절). 그의 질문에는 그들에게서 받은 푸대접에 대한 앙금이 배어 있습니다. 아비멜렉은 “우리는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심을 똑똑히 보았습니다”(28절)라고 말을 시작합니다. 그는 아브라함에게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21:22). 여기서 아비멜렉이 “주님”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은 “당신의 신이 당신과 함께 하심을 똑똑히 보았습니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는 그랄 민족의 신을 섬기고 있었을 터인데, 자신이 믿는 신보다 이삭이 믿는 신이 더 강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브라함에게 제안한 것과 똑같이 자신과 평화조약을 맺자고 제안합니다(29절). 이삭이 세력이 커지고 나면 자신들에게서 받은 푸대접에 대해 복수할지 모른다고 염려했던 것입니다. 그는 다시 한 번 “당신은 분명히 주님께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라고 덧붙입니다.
이삭은 그 제안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들을 맞아들여 큰 잔치를 베풀고 다음 날 계약을 맺은 후에 돌려 보냅니다(30-31절). 아브라함은 하지 않았던 일을 이삭이 행한 것입니다. 그들이 떠나고 나자 종들이 새로 판 우물에서 물이 터졌다고 알려옵니다(32절). 이삭은 그 샘의 이름을 ‘세바’라고 짓습니다(33절). 아브라함이 이미 그곳의 이름을 ‘브엘세바’(맹세의 우물)라고 지어 놓았기 때문입니다(21:31). 이런 연유로 하여 브엘세바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서 깊은 장소가 됩니다.
묵상:
아비멜렉이 이삭을 찾아 와서 두 번이나 “당신은 주님께 복 받은 사람입니다”(28절, 29절)라고 말한 것은 평화조약을 얻어내기 위해 아첨하는 말일 수 있지만, 정말 그렇게 느꼈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군사를 데리고 와서 그랄 땅 바깥으로 쫓아내거나 모두를 살해하려 했을 것입니다. 이삭의 세력이 커졌다고 해도 아직은 아비멜렉을 대적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가 평화조약을 맺기로 마음 먹었다는 사실은 아브라함에게서 그랬던 것처럼 이삭에게서도 초월적인 힘이 그를 보호하고 있다는 느낌을 부정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모두에게 버려진 땅에서 그토록 번성하는 것은 그들의 신이 그들을 돌보고 있다는 증거로 보였던 것입니다.
때로 하나님은 당신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을 번영하게 하십니다. 손 대는 것마다 형통하게 하시고, 죽을 병에서 건져 주시기도 하시며,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위로 솟아나게도 하십니다.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에서 아브라함과 이삭이 번성한 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보셨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이삭도 단을 쌓고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하나님은 언제나 믿는 사람들을 복되게 하신다” 혹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는 이 세상에서 번영하고 성공하는 것이다”라고 결론 지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뒤집으면 “이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하고 번영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 버림 받은 증거다”라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도 실패할 수 있고 상처 받을 수 있으며 질병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인생 여정에도 그런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버림 받았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더 가까이 계셨고 섬세하게 인도해 주셨습니다.
아비멜렉은 기복적인 신관을 가지고 있었기에 아브라함과 이삭이 번영할 때에야 그들이 믿는 신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 차렸습니다. 그가 성숙한 사람이었다면 처음부터 그 사실을 알아 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은 번영의 때보다 고난의 때에 더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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