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귐의 소리

예정이냐 자유냐? (창 25:19-26) / 김영봉목사

새벽지기1 2024. 5. 26. 06:04

해설:

저자는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의 일생을 요약하고 나서 이삭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19절). 이삭이 리브가와 결혼한 것은 사십 세 되던 해(즉 아브라함이 140세 되던 해)의 일입니다(20절). 결혼 이후 이십 년 동안 이삭과 리브가 사이에 아이가 들어서지 않습니다. 사라도 그랬는데, 며느리도 같은 처지가 되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자녀가 없는 것은 가장 큰 불행의 이유였습니다. 게다가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이제나 저제나 기다려도 태기가 없자 이삭은 하나님께 간구합니다(21절). 저자는 이삭의 기도를 한 문장으로 처리했지만 실제로는 오래도록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상기시키며 자녀를 달라고 간구했을 것입니다. 

 

얼마 후 하나님은 이삭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리브가가 임신을 합니다. 결혼한 지 십구 년 만의 일입니다. 임신을 한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리브가는 극심한 임신통을 겪습니다. 견디다 못하여 리브가는 주님께 호소합니다. “주님께로 나아갔다”(22절)는 말은 하나님 앞에 나아갔다는 뜻일 수도 있고 예언자에게 찾아갔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의 태중에 두 민족이 들어 있으며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라고 계시해 주십니다(23절).

 

때가 되어 해산을 해 보니 쌍둥이였습니다(24절). 먼저 나온 아이는 “살결이 붉은데다다 온몸이 털투성이어서”(25절) ‘털’이라는 의미로 ‘에서’라고 이름 짓습니다. 첫째에 이어 둘째가 나오는데 첫째의 발꿈치를 잡고 있는 듯했습니다(26절). 리브가는 두 아이가 먼저 나오려고 싸웠다고 생각하고는 둘째의 이름을 ‘발꿈치를 잡다’ 혹은 ‘속이다’라는 의미로 ‘야곱’이라고 지었습니다. 리브가는 두 아이를 키우면서 하나님께로부터 들은 예언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곰곰이 지켜 보았을 것입니다. 그 때가 이삭이 육십 세 되는 해였습니다.  

 

묵상:

“인생은 하나님에 의해 결정된 것일까, 아니면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일까?“ 이 질문은 지난 이천 년 동안 신학자들이 끊임없이 논쟁해 온 질문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결정된 것이라는 믿음을 “예정론”(결정론)이라고 부르고, 각자가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믿음을 “자유의지론”이라고 부릅니다. 그동안 수 많은 신학적 천재들이 이 질문에 대해 결판을 내려고 시도했지만, 아직도 판결이 나지 않았습니다. 어느 한편으로 판결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에서와 야곱의 출생 이야기를 살펴 보면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과 섭리도 보이고 인간의 선택과 결정도 보입니다. 이삭과 리브가는 하나님이 정해 놓은 대로 움직이는 로봇이 아니었습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따르면서도 스스로의 생각과 판단에 따라 선택하고 결정합니다. 그것만 보면 자유의지론이 맞는 것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인생을 계획하고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도 보입니다. 

 

리브가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예정론에 대한 증거 본문으로 자주 사용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의 이야기를 읽어 보면 에서와 야곱은 스스로의 생각에 따라 판단하고 선택합니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인생길을 개척해 나갔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리모콘으로 기계를 움직이는 것처럼 그들을 조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하나님의 계시가 이루어지는 것을 봅니다. 결국 인생사는 각자 만들어 가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조종하시는 것도 아니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가 스스로의 생각과 판단과 선택에 따라 살아가게 하십니다. 사랑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분은 우리의 생각과 판단과 선택을 엮어서 우리 각자와 모두에 대한 그분의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우리 자신의 욕망대로 살든 그분의 뜻을 따라 순명하며 살든, 결국 모든 것은 그분의 뜻과 계획대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가장 좋은 것은 그분의 뜻을 따라 순명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분을 떠나 자신의 욕망대로 사는 것은 “가시 돋친 채찍을 발길로 차는 것”(행 26:14)과 같습니다. 결국 자신의 불행만을 키울 뿐이라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