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귐의 소리

선택과 축복 (창25:1-11) / 김영봉목사

새벽지기1 2024. 5. 24. 05:18

해설:

저자는 11장에서부터 시작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여기서 끝맺습니다. 사라가 죽은 이후에도 아브라함은 40여 년을 더 삽니다. 그는 그두라라는 여인을 후처로 맞아서 여러 아들을 얻습니다(1절). 그들의 자손들은 각각 번성하여 여러 민족의 조상이 됩니다(2-4절). 그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렇게 성취 되어 갑니다. 

 

아브라함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후처의 아들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고 분가시키고 이삭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줍니다(5-6절). 그는 후처의 아들들에게도 아버지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하여 아브라함은 백칠십오 세의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합니다(7-8절).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하란을 떠난 지 백 년이 되는 해에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세상을 떠나자 이스마엘이 찾아와 이삭과 함께 그를 장사 지닙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이 사 둔 막벨라 굴에 어머니 사라와 함께 합장합니다(9-10절). 이로써 아브라함에게 임했던 복은 그의 아들 이삭을 통해 이어지게 됩니다(11절).

 

아브라함이 백 세에 이삭을 낳았으니, 그가 죽었을 때 이삭은 칠십오 세였다는 뜻입니다. 이삭이 쌍둥이 아들을 낳은 것이 육십 세 때였으니(25:26), 아브라함은 에서와 야곱이 쉰다섯 살이 될 때까지 살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시기적으로 한다면 아브라함의 죽음 이야기는 훨씬 뒤에 나와야 합니다. 저자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마감하고 이삭과 그의 두 아들에 대한 이야기에 집중하기 위해 아브라함의 죽음 이야기를 앞당겨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이것은 창세기의 저자가 필요에 따라 시간적인 순서를 뛰어 넘었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묵상:

아브라함이 세상을 떠났을 때 이스마엘이 이삭과 함께 장례를 치뤘다는 기록이 눈길을 끕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이 바란 광야에 정착한 지 칠십 년도 넘은 때의 일입니다. 그들은 사라의 성화로 인해 광야로 쫓겨나 생사의 고비를 넘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그 상처를 원한으로 키워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마엘이 이삭과 함께 아버지의 장례를 치뤘다는 사실은 그가 아버지 혹은 이삭에 대해 앙심을 품고 있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이스마엘에게 기별을 한 것으로 보아 이삭도 이스마엘과 계속 관계를 가지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사라의 성화 때문에 그들을 내보낸 후에 아브라함은 사라 몰래 그들을 도와 주었을 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을 ‘편애’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석하면 ‘선택받지 못함’을 ‘버림 받음’ 혹은 ‘미움 받음’으로 해석하게 됩니다. 그것은 성경을 오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 특정한 사람들을 선택하여 당신의 일을 이루십니다. 특정의 사람을 선택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선택받지 못했다는 말은 버림 받았다는 뜻도 아니고 미움 받았다는 뜻은 더더욱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주권적인 섭리 안에서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을 택하셨습니다. 그 선택은 이삭만이 아니라 이스마엘과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하갈에게도, 이스마엘에게도 사랑과 축복을 베푸셨습니다.

 

성경을 읽으며 우리는 선택 받은 사람들에게 주목합니다. 그것이 잘못은 아니지만,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을 버림 받거나 미움 받은 사람들로 보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우리는 사라만이 아니라 하갈도, 이삭만이 아니라 이스마엘도, 야곱만이 아니라 에서도, 라헬만이 아니라 레아도, 요셉만이 아니라 다른 형제들도 하나님의 사랑과 복을 누렸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변에서 만나는 소수자들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