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귐의 소리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창세기 22장) / 김영봉목사

새벽지기1 2024. 5. 21. 05:11

해설:

22장은 “이런 일이 있은지 얼마 뒤에”(1절)라고 시작하지만, 실은 십 수년 후의 일입니다. 이삭이 장작을 짊어지고 산을 오를 정도면 적어도 십대 중반은 되었을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그를 부르십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굳이 시험해 보아야 했느냐?”고 질문하는 것은 관계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모르고 하는 질문입니다. “예, 여기에 있습니다”는 히브리어로 “힌네니”인데, 이 말은 전적인 순종의 자세를 표현합니다. 아브라함은 그동안의 여러 시험을 통해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하고 무슨 처분이든 따를만큼 영적으로 성장해 있었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최대, 최악의 시험을 안겨 주십니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2절)이라고 표현은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지를 강조합니다. 번제물로 바치라는 말은 그를 죽여서 재만 남을 때까기 태우라는 뜻입니다. 온전한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면 상상하기도 끔찍한 명령입니다. 

 

아브라함은 “다음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3절) 아들을 깨워 준비시키고 장작을 쪼개어 길을 떠납니다. 아무 생각 없이 순종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는 명령에 괴로워서 잠을 못 이루다가 동이 트자 떨치고 일어나 일단 길을 나선 것입니다. 

 

사흘 길을 가는 동안 그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을 두고 수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무턱대고 하나님을 믿고 떠난 자신에게 25년이 지나서야 달랑 아들 하나를 안겨 주시더니 이제 와서 번제로 바치라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떻게 제 아들을 제 손으로 죽여서 태워 바치라는 것인가? 이민족들이 사람을 제물로 바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브라함은 자신이 믿는 하나님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가 믿는 하나님은 사람을 제물로 요구하는 야만적인 신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자신의 아들을 자신의 손으로 잡아 바치라고 하시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이 하나님을 정말 믿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이 되었을 것입니다. 지난 세월 동안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행하신 일들을 돌아 보면 믿어야 할 것 같은데, 지금 당장 주어진 명령을 생각하면 믿을 수가 없습니다. 

 

모리아 산에 도착했을 때 아브라함은 결론을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4절). 그는 두 종을 산 아래에 두고 “예배를 드리고 너희에게로 함께 돌아올 터이니”(5절) 기다리라고 한 다음, 이삭에게 장작을 지게 한 다음 산을 오릅니다(6절). 산에 오르는 동안에 사정을 알지 못하던 이삭이 제물로 쓸 짐승은 어디에 있느냐고 묻습니다(7절). 아브라함은 당황하여 “얘야,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손수 마련하여 주실 것이다”(8절)라고 답합니다. 엉겁결에 한 대답이었지만 예언이 되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고 장작을 펼쳐 놓고는 이삭을 묶어서 제단 장작 위에 올려 놓습니다(9절). 어떤 사람들은 이 때 이삭이 아무 말 없이 아버지의 처분에 따랐다고 해석하지만, 그렇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어린 이삭은 저항하다가 결국 결박되어 제단에 올려져 엉엉 울었을지 모릅니다. 아버지도 울고 아들도 울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결국 아들의 목을 향해 칼을 듭니다(10절). 그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을 것입니다. ‘어디,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끝까지 한 번 해 보자!’는 심산이었는지 모릅니다. 

 

그 때 하늘에서 아브라함을 부르는 음성이 들립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또 다시 “예, 여기 있습니다”(11절)라고 답합니다. 주님의 천사는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고 하시면서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도 나에게 아끼지 아니하니, 네가 하나님 두려워하는 줄을 내가 이제 알았다”(12절)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 보니 숫양 한 마리가 보였고, 아브라함은 그 양을 잡아 번제를 드립니다(13절).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 곳의 이름을 ‘여호와이레’라고 짓습니다(14절). 그런 다음 주님의 천사는 아브라함을 처음 불러 낼 때 주신 축복의 약속을 다시 한 번 확인해 주십니다(15-18절).

 

이 이야기 다음에 저자는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자손에 대해 소개합니다(20-24절). 그들은 아브라함과 달리 하란 땅에 그대로 남아 살았습니다. 나홀의 자손들을 여기에 소개하는 이유는 이삭의 아내 리브가 때문입니다. 

 

묵상:

믿는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듯’ 신뢰하고 살아가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며 나의 삶을 주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그분의 손에 자신의 삶을 맡긴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루 하루를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내 존재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처분에 맡기고 “주님, 마음대로 하십시오”(“힌네니”, 1절, 11절) 하고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아시는 분은 하나님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말은 쉬운데 실제로 행동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일이 잘 풀려 나갈 때는 하나님의 돌보심과 인도하심에 감사하게 되지만, 일이 잘 풀려 나가지 않을 때면 불안해집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 맡기고 기다리기 보다는 내 힘과 수단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더 나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중에 보면 그것이 결국 문제를 더 그르치는 길이 되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런 실수를 반복하면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신뢰를 배워 나갑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고향을 떠난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에 그가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다 알지 못합니다. 12장부터 21장까지 기록된 내용은 지극히 작은 일부에 불과합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떠난 아브라함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살아가는 법을 익히기까지 수 없는 시험을 거쳤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그는 결국 하나님 앞에 “예,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처분대로 따르겠습니다”라고 말씀 드리는 수준에 이른 것입니다. 그 철저한 신뢰가 인간으로서 감당할 수 없는 최악의 시험을 통과하면서 완성되는 장면을 여기서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신뢰, 이것은 우리에게 너무도 어려운 숙제요 너무도 자주 넘어지게 하는 시험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기도합니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주님 뜻대로 인도하소서. 주님의 처사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 때조차 주님을 신뢰하고 따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