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드디어 때가 되었고 아브라함은 사라를 통해 아들을 얻습니다. 저자는 1절에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행하셨다는 사실을 두번 강조합니다. “돌보셨다”고 번역된 단어(‘파카드’)는 “방문하셨다”고 번역할 수 있는데, 이것은 주님께서 어떤 대상에게 구체적인 행동을 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저자는 또한 그들이 아들을 얻은 것이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합니다. 2절에서는 “늙은 아브라함”이라고 했고, 5절에서는 그의 나이가 백 살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했고, 6절과 7절에서는 사라의 독백을 통해 불가능한 일이 일어났다고 강조합니다. 7절에 나오는 사라의 질문은 수사적 의문문입니다. “사라가 자식들에게 젖을 물리게 될 것이라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할 엄두를 내었으랴?”는 질문은 “그럴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낳은 아들을 이삭이라고 이름 짓고(3절) 여드레 만에 이삭에게 할례를 베풉니다(4절).
묵상:
아브라함과 사라는 아들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거듭 회의하고 의심했습니다. 그 약속의 실현이 늦어지자 사라는 자구책을 써서 이스마엘을 아브라함에게 안겨 줍니다. 이스마엘이 자라는 것을 보면서 그들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려 해도 이전 늦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라는 이미 생리가 끊겼고 아브라함은 늙어서 마른 나무처럼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국 약속대로 행하십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회의와 의심과 불신이 하나님께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믿고 따르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분의 말씀대로 행하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인도하시고 돌보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늘 믿음으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그분의 존재를 자주 의심하고, 그분의 뜻을 자주 무시합니다. 인간적인 시각에서 판단하고,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결정합니다. 그럴 때면 하나님의 뜻은 멀고 우리의 생각은 가깝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가망 없어 보이고, 내 생각이 더 그럴 듯해 보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뜻을 알면서도 내 뜻을 따릅니다. 그분의 약속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수단과 방법을 끌어다 사용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그분이 정하신 일을 행하십니다. 우리의 회의와 의문과 불신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십니다. 그분은 육신 안에 사는 한 우리는 언제든 넘어질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간혹 우리의 언행을 보시고 하나님이 계획을 바꾸기도 하십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외적인 일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언행심사를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 보시지만, 그에 따라 이랬다 저랬다 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그분의 성품을 ‘헤세드’로, 신약에서는 ‘아가페’로 표현합니다. 두 단어 모두 “한결같은 사랑”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은 한결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이 맺어주신 사랑의 언약 안에 들어온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은 우리의 믿음 이전에 하나님의 믿음(faithfulness, 한결같은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이라면 우리의 구원은 언제든 위협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언약에 있기에 우리는 마음 든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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