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귐의 소리

변함없는 하나님의 약속 (창세기 20장) / 김영봉목사

새벽지기1 2024. 5. 16. 05:14

해설:

그 즈음에 아브라함은 마므레를 떠나 네겝 지역으로 이사하는 중에 그랄 지방에 잠시 머물게 되었습니다(1절). 그곳에서도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소개합니다. 13절에 보면, 그것은 이주민의 삶을 시작하면서 아브라함과 사라가 택한 생존 전략이었습니다. 그 생존 전략 때문에 이집트에서 둘 다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이십여 년이 흐른 뒤에 그랄에서 두 사람은 또 다시 그런 상황을 만납니다. 아비멜렉은 사라가 아브라함의 누이라는 사실을 믿고 후궁으로 삼으려고 데려 갑니다(2절). “데려갔다”는 표현은 강압적인 탈취 행위를 의미합니다. 당시 권력자들은 자신의 영역 안에 들어온 사람들을 이와 같은 방식으로 길들이곤 했습니다.

 

이 위기에서 하나님은 또 다시 전격적으로 개입하십니다(3-7절). 아비멜렉이 사라와 동침하기 전에 하나님은 그의 꿈에 나타나 사라를 취한 그의 행위를 책망하십니다. 그 일로 그는 죽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18절에 의하면, 하나님은 그 일로 인해 아비멜렉 집안의 모든 여인들의 태를 닫으셨습니다. 

 

아비멜렉은 사라를 후궁으로 취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잘못한 것은 전혀 없고 오히려 잘못은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있다고 항변합니다. 하나님은 그 사실을 인정하십니다. 그렇기에 그가 더 큰 죄를 짓기 전에 막으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예언자”(7절)로 소개하면서 사라를 남편에게 돌려 보내라고 명령하십니다. 

 

다음 날 아비멜렉은 신하들을 불러서 간밤에 있었던 일들을 전해 줍니다. 신하들은 왕이 하는 말을 듣고 모두 두려워 떱니다(8절). 왕은 아브라함을 불러 크게 호통을 칩니다(9-10절). 그러자 아브라함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변호합니다. “이 곳에서는 사람들이 아무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11절) 사라로 인해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것은 당시에 흔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란을 떠날 때 생존 전략으로서 낯선 나라에 들어갈 때는 누이라고 소개하기로 했습니다(13절). 실제로 사라는 아브라함의 이복 누이였기에 그렇게 말한다고 틀린 것은 아니었습니다(12절). 사라로 인해 아브라함이 죽는다면 그것은 사라 자신에게도 큰 불행이었기에 두 사람이 그렇게 전략을 짰던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사라를 아브라함에게 돌려 보내면서 많은 재산을 더해 줍니다(14-15절). 일종의 위자료인 셈입니다. 또한 그는 사라에게 진실한 사과의 마음을 전합니다(16절). 그에 대한 대가로 아브라함은 아비멜렉과 그의 가족 그리고 그의 백성들을 위해 축복을 빌어 줍니다(17절).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비멜렉 가족에 속한 여인들의 태를 다시 열어 주십니다(18절).

 

묵상: 

그랄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이 즈음이면 아브라함은 이런 실수는 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그동안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전권적인 개입을 여러 번 경험해 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된 12장부터 20장까지에 기록된 이야기들은 이십 년이 넘는 기간 동안에 일어난 일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시간적인 고려를 하지 않고 읽으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자주 나타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개입은 그에게도 예외적인 일이었고,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는 “보이지 않는 분을 마치 보는 듯이 바라보면서“(히 11:27) 살기를 힘썼을 것입니다. 

 

믿음은 한 순간에 소유하는 어떤 물건이 아닙니다. 매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듯이 믿고 신뢰하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실함” 혹은 “충성” 혹은 “한결같음”이라는 표현이 더 낫다고 했습니다. 믿고 산 세월이 많다고 해서 그만큼 믿음이 쌓이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관계이기 때문에 매일 새롭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어느 순간에 휘발되어 사라집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은 두려운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멀어 보일 경우, 과거에 아무리 대단한 체험을 했다 해도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됩니다. 나는 “믿음으로 살아가지 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아니합니다”(고후 5:7)라고 고백하던 사람도 때로 “보는 것”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그랄에서 아브라함이 범한 잘못을 두고 그를 뭐라 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그의 입장이었다 해도 그랬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실수할 수 있고 잘못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아십니다. 그렇기에 그분은 우리의 잘못을 애정어린 눈으로 보십니다. 그분은 아브라함이 눈에 보이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분을 잊었음에도 전격적으로 개입하셔서 사라를 구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맺어주신 언약을 기억하고 그를 위해 행동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에 상관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는 용서하지 못할 정도로 큰 죄도 없지만, 문제되지 않을 정도로 작은 죄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당신의 언약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약속을 지키십니다. 잘못은 분명 뼈아프게 회개해야 할 일이지만, 그로 인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은 취소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언약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사랑은 상황에 따라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그 사랑 안에 든든히 자리 잡고 살아갈 때 우리는 부끄러운 잘못과 실수로부터 온전히 벗어나는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