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귐의 소리

하나님의 플랜 A(창18:16-33) / 김영봉목사

새벽지기1 2024. 5. 12. 06:42

해설:

아브라함을 방문했던 세 사람은 소임을 마치고 소돔 쪽으로 향합니다. 아브라함도 그 길에 얼마 쯤 동행합니다(16절). 그 길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에게 두 가지를 알려 주십니다. 첫째, 주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번성하게 해 주실 것이고 모든 민족이 그의 자손을 통해 복을 받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17-19절). 그러기 위해 그의 자손은 주님의 뜻을 따라 “옳고”(‘쩨데크’) “바르게”(‘미쉬팟’) 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선택한 이유는 모든 인류를 복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둘째, 주님은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상을 살펴 보겠다고 하십니다(20-21절). 불의와 폭력으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의 호소가 하나님께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말한 다음 두 사람은 소돔으로 떠나고 주님의 대언자만 남습니다(22절). 아브라함도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상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두 도시가 주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하고 소돔에 사는 조카 롯의 가족을 생각하여 주님께 간청을 합니다. “주님께 가까이 가서”(23절)에 사용된 히브리어는 법정에서 변호사가 피고를 변호하기 위해 판사 앞에 나서는 행동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성 안에 의인이 쉰 명밖에 없다 해도 심판하시겠느냐고 여쭙니다. 여기서 사용된 “의인”이라는 말이 법정 용어로 사용될 때는 “무고한 사람”(innocent)이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무리 수가 적다 해도 악인들을 심판하기 위해 무고한 사람들까지 희생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의에 위배되는 일이라고 주장합니다(24-25절). “주님께서 하실 일이 아닙니다”(개역개정 “부당하오며”)라는 말을 두번이나 사용하여 심판의 부당성을 강조합니다. 놀랍게도 주님은, 의인 오십 명을 찾을 수 있으면 심판하지 않겠다고 답하십니다. 

 

주님의 응답에 아브라함은 놀라고 당황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선선히 자신의 청을 들어 주실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또한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무고한 사람이 오십 명도 되지 않으니 그렇게 답하신 것 같다고 생각했기 떄문입니다. 

 

그는 다시 용기를 내어 무고한 사람이 사십오 명만 있으면 어쩌시겠느냐고 여쭙니다. 주님은 그 청도 허락합니다(27-28절). 아브라함은 마치 물건 값을 두고 상인과 거래를 하는 것처럼 다섯 명씩 줄여가며 계속 제안을 합니다. 하나님은 그럴 때마다 그러겠다고 답하십니다. 마침내 열 명에 합의하게 되었고, 아브라함은 더 이상 줄여달라고 요청할 염치가 없었습니다. 그는 ‘무고한 사람이 열 명이야 있겠지’ 하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아브라함은 주님과의 대화를 마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갑니다(33절).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막기 위해 자신이 할 일은 다 했지만, 왠지 불안한 마음은 어쩌지 못했을 것입니다.

 

묵상:

구약성경에 기록된 이야기들 속에는 인간의 죄에 대해 분노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자주 나옵니다. 율법은 죄에 대한 가혹한 심판을 요구하고, 역사서에는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의 이야기가 주로 기록되어 있으며, 예언자들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예고합니다. 시편에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고통 받는 이들의 탄식과 간청이 자주 나오고, 지혜서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길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어떤 사람들은 구약성경의 하나님은 신약성경의 하나님과 다른 분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 생각에 근거하여 구약성경을 배격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진화’를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인류와의 관계 속에서 변화되어 왔다는 뜻입니다. 

 

온 우주와 온갖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빠”라고 불렀던 그분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이스라엘을 제사장의 나라로 삼으신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어 인류를 죄와 사망 가운데서 해방시킨 분이며, 오순절에 성령을 부으셔서 교회라는 새로운 언약 백성을 일으키신 분입니다. 예수께서 “아빠”라고 부르셨던 그 하나님은 본질이 사랑이며 본성이 사랑이십니다. 사랑으로 온 우주와 온갖 생명을 창조하셨고, 사랑으로 당신의 아들을 주셨으며, 사랑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실 분입니다. 

 

그렇다면 왜 구약에서 하나님은 이토록 무서운 분으로, 분기탱천한 분으로 보이는 것일까? 그 이유는 후대에 성경을 읽는 독자들에게 교훈이 될만한 이야기들이 주로 선택되어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등장인물 개인에 대한 기록이든,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기록이든, 그들이 실패한 이야기들이 주로 기록되었습니다. 예언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거룩하고 의롭게 살아갈 동안에는 예언자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우상숭배와 온갖 불의에 빠져서 타락의 길을 갈 때 하나님은 예언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러니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을 전하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심판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플랜 B’입니다. 하나님의 ‘플랜 A’는 언제나 사랑이며 용서이고 은혜이며 오래 참음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심판을 두고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나눈 대화에서 그 진실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뜻은 심판이 아니라 사랑에 있습니다. 심판은 하나님의 사랑을 끝내 거절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몫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