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귐의 소리

우리 곁에 계신 하나님 (창18:1-15) / 김영봉목사

새벽지기1 2024. 5. 11. 06:28

해설:

중동 지방에서 “한 창 더운 대낮”(1절)은 모두가 행동을 멈추는 시간입니다. 아브라함도 자신의 장막에서 쉬고 있는데, 낯선 사람 셋이 홀연히 자신의 장막 앞에 서 있습니다. 저자는 “서 있었다”(2절)는 표현으로 독자에게 그들이 범상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아브라함은 그 사람들에게서 뭔가 특별한 것을 감지하고 그들 앞에 절을 합니다. 한 부족의 족장으로서 이것은 이례적인 행동입니다. 그는 손님들을 초청해 들이고 빵을 굽고 송아지를 잡아 성찬을 대접합니다(3-5절). “고운 밀가루 세 스아”(6절)는 우리 식으로 하자면 12되 정도 되는 많은 양입니다. 아브라함은 물 한 그릇 대접하겠다면서 손님들을 맞아 들인 후 융숭하게 대접합니다(7-8절).

 

음식을 다 먹고 나서 그들이 사라를 찾습니다(9절). 아브라함이, 사라가 장막 안에 있다고 답하니, 그들 중 한 사람이 내년에 사라에게서 아들을 얻게 될 거라고 예고합니다(10절). 새번역은 “주님께서 말씀하셨다”라고 번역했는데, 직역하면 “그 사람이 말했다”고 해야 합니다. 세 사람 중 하나가 주님을 대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라가 장막 안에서 이 말을 듣습니다. 그의 나이 89세이고 남편의 나이는 99세입니다. 생리가 끊긴 지도 오래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예고를 듣고 사라는 실소를 금치 못합니다(11-12절). 그 사실을 손님들이 알아 차리고는, 주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으며 자신의 약속 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일러 주십니다(14절). 사라가 장막 안에서 그 말을 듣고 나와서 웃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그들은 “아니다, 너는 웃었다”(15절)고 답하십니다. 

 

묵상: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단면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정된 사물이 아니라 인격이십니다. 인격체로서의 인간은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물과 인격체의 차이입니다. 사물은 언제나 같은 모습, 언제나 같은 반응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반면, 인격체는 상황과 관계의 성격에 따라 다르게 행동하고 반응합니다. 때로 울고 때로는 웃습니다. 때로 분노하고, 때로 기뻐합니다. 때로 마음을 단단히 하여 비정해지지만, 때로 마음을 누그러뜨려 자비와 관용을 베풉니다. 

 

하나님이 인격이시라는 말은 상황과 관계에 따라 다르게 반응하시고 행하신다는 뜻입니다. 다만, 인간은 공정하지 못하고 예측 불가능하며 부조리할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이나 행동을 하게 됩니다. 죄성으로 인해 우리의 인격에 손상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완전하신 하나님은 반응과 선택과 결정에 있어서 언제나 옳습니다. 

 

아브라함과 세 손님 사이의 대화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그분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을 흔듭니다. 그분은 초월자로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 손님으로 변장하고 찾아 오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고대 히브리인들은 나그네를 환대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미덕으로 여겼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나그네를 대접하기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어떤 이들은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대접하였습니다”(13:2)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헐벗고 고통 받는 이들에게 행한 것이 바로 당신에게 행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25:31-46). 하나님은 모든 이들 안에 계시며, 모든 이들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눅 17:21). 

 

하나님은 또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긍휼히 보십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약속 받았을 때, 그도 역시 믿지 못하고 이스마엘이나 잘 자라게 해 달라고 응답합니다(17:17-18). 주님은 아브라함의 불신과 회의를 책망하지 않으시고 약속을 재확인 시켜 주십니다. 사라의 불신에 대해서도 주님은 동일하게 행동하십니다. 사라가 주님의 약속에 대해 실소로 응답한 것도, 웃지 않았다고 거짓말 한 것도 묵인해 주십니다. 마치 빙긋이 미소를 지으시면서 “네가 믿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지. 하지만 내가 어떻게 하는지 기다려 보아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분을 “아빠!”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를 대하듯 우리에게 친밀하게 다가 오셔서 함께 웃고 함께 울기 원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함께 아파 하시며 사랑으로 감싸 주십니다(히 4:15).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라고 찬송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