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귐의 소리

폐허 가운데 피어나는 희망 (창19:30-38) / 김영봉목사

새벽지기1 2024. 5. 15. 07:06

해설:

소알 성으로 피신하여 목숨을 건진 롯은 지독한 피해망상에 시달립니다. 요즘 말로 하면 ‘외상후증후군'(PTSD)에 시달린 것입니다. 그는 소알에 사는 것이 두려워 두 딸과 함께 산 속 동굴로 숨어 듭니다(30절). 천사들이 산으로 피신하라고 할 때 롯은 소알 성으로 가게 해 달라고 청했습니다(19:20). 도시 생활에 익숙한 까닭에 산에 숨어 들어가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제 발로 산 속으로 숨어 들어갑니다. 소알 성 주민들이 자신들의 정체를 알고 쫓아내거나 죽일 지도 모르고, 소알 성이 소돔과 고모라처럼 심판 받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생활하는 기간이 길어지자 두 딸에게는 자손을 이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염려가 들었습니다. 당시 문화에서는 여성에게 가장 큰 힘은 자녀였고 자손을 잇는 것이 가장 큰 과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아내로 맞아 줄 사람을 찾을 수 없으리라는 두려움이 들자, 두 딸은 아버지를 통해 대를 잇기로 합니다. 그들은 아버지를 술에 취하게 만들어 차례로 동침을 합니다(31-35절). “아버지의 자리에 들어가서”(33절, 34절)라는 말은 성관계를 의미하는 에두름 말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이 표현은 성폭행을 묘사할 때 사용합니다. 딸들은 아버지의 의지에 반하여 그렇게 행동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큰 딸의 아들에게서 모압 백성이 나왔고, 둘째 딸의 아들에게서는 암몬 백성이 나왔습니다(36-38절). 두 민족은 두고 두고 아브라함의 자손과 적대 관계 안에서 살았습니다. 

 

묵상:

롯은 창세기에 나오는 인물들 중에 조연급이지만, 그의 마지막은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요즘 말로 하면 그는 창세기의 ‘신스틸러’(scene stealer, 영화에서 잠시 출연하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등장인물)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서 롯과 두 딸을 심판에서 살아남게 하셨지만, 그 이후의 삶은 차라리 소돔 성 사람들과 함께 죽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참담했습니다. 불의 심판 가운데 홀로 살아남았다는 것이 그에게는 축복이 아니라 무거운 마음의 짐이었습니다. 눈만 감으면 소돔과 고모라에 떨어져 내리던 유황불의 소나기가 나타나 그를 괴롭혔습니다. 제 정신이 돌아오면 그는 소알 성 사람들로부터 자신의 정체가 발각되어 죽임 당하는 것은 아닌지 불안했습니다. 그는 결국 두 딸을 데리고 산 속으로 피신합니다. 팔레스틴의 돌산에는 자연 동굴이 많아서 그곳을 거쳐 삼았습니다.

 

하지만 그 동굴은 더 큰 비극의 온상이 되어 버립니다. 두 딸은 폐인이 되어버린 아버지가 죽게 되면 어찌 살아갈 수 있을지 염려가 되었습니다. 자녀라도 있으면 나을 것 같은데, 자신들을 아내로 받아 줄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습니다. 큰 딸은 아버지를 통해서라도 자식을 얻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동생과 함께 일을 꾸밉니다. 얼마 후, 롯은 두 딸의 배가 불러오는 것을 보고 상황을 짐작했을 것입니다. 두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는 동안 롯은 아들도 아니고 손자도 아닌 그 아이들을 차마 대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끊을 수 없는 목숨 줄을 간신히 붙들고 살다가 한 많은 인생 여정을 마쳤을 것입니다.

 

저자는 마지막에 큰 딸의 아들이 모압 백성의 조상이 되었고 둘째 딸의 아들이 암몬 백성의 조상이 되었다고 기록함으로써 롯이 죽은 후에 두 딸에게 일어난 일을 독자들이 상상할 수 있게 합니다. 자세한 상황을 알 수 없지만 두 딸이 아들들과 함께 살아 남았습니다. 롯의 거듭된 패착으로 인해 풍비박산 되었지만, 그 폐허 가운데서 새로운 싹이 돋아나게 하셨습니다. 

 

때로 인생은 이렇게 참담하게 망가질 수 있습니다. 어떻게든 살아 남으려는 의지는 때로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게 만듭니다. 선의를 가지고 행한 선택이 비극을 낳기도 합니다. 그것이 인생사요 세상사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많들어 내는 그 다양한 실패와 패착과 오판과 비극을 엮어서 그분의 역사를 이어 가십니다.